기술주 조정이 간만에 오는듯 싶다.
이럴 때마다, 내 손안에 쥐고 있는 새를 포기하고 수풀 너머 어딘가에 더 많은 새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만으로 뛰쳐나가려는 인간 심리를 두고 했던 버핏 할아버지의 농담이 떠오른다.
이번글은 두서없이 최근의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던 생각들의 흐름을 정리해보려고한다.
1. 출발점: 불안과 이기심, 그리고 내가 보는 세계
개인적으로 여러 사회현상을 이해하려 할 때 먼저 인간 본연의 불안심리와 이기심, 그리고 그 뒤에 숨어 있는 의도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이것은 추상적인 정치적 신념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내 개인의 심리 상태에서 출발한다.
사람에게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 대체로 자기 이익을 최우선으로 두게 된다. 그 과정에서 타인의 이익을 고려하는 이타성은 밀려나고, 타인의 몫을 잠식해서라도 나를 지키려는 이기심이 전면으로 나온다.
내가 이해하는 세계에서는, 마음의 여유는 대체로 다음의 순서를 거쳐야 비로소 생긴다.
일정 수준 이상의 물질적 만족과 풍족함,
그 위에 쌓인 자아정체성과 자존감의 안정,
마지막으로 자리 잡는 정신적 만족과 심리적 안정감.
이 세 층위가 받쳐 줄 때 사람은 비로소 자신의 영향력을 주변으로 확장하는 이타심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 구조는 개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 전체의 집단 심리에도 그대로 투영된다고 본다.
가난하고 불안한 개인이 이기적으로 변하듯, 가난하고 불안한 국가는 집단적 이기주의로 기울기 쉽다고 보는 것이다.
실제로 글로벌 대공황 시기에는 이런 집단 심리가 각국에서 서로 다른 형태의 극단화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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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는 극심한 실업과 불만이 나치당과 히틀러의 부상에 비옥한 토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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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는 해외 시장과 자원 확보를 명분으로 한 군부 주도의 팽창 정책이 강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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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는 세계공황, 은본위제 붕괴, 전시 재정난이 겹치며 통화 불안과 인플레이션, 정권 불안정이 심화되며, 공산당 확장의 밑거름이 되었다.
따라서 나치즘, 군국주의, 공산주의 세력이 비슷한 시기에 동시에 부상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흘러도 인간의 본연의 이기심은 쉽게 바뀌지 않으며, 불안과 결핍이 커질수록 그 성향은 더 구조적으로 확대되기 때문이다.
2. ‘독이 든 사과’로서의 정보, 그리고 독립성
이 불안과 이기심에 대한 인식은, 내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나는 대체로 먼저 다가와 과도하게 친절을 베푸는 사람, 특히 회사 내부 정보를 먼저 흘려주는 사람을 강하게 경계한다.
그들이 전해주는 정보는 나에게 독이 든 사과에 가깝다.
그 정보의 사실 여부나 중요도와는 상관없이, 이런 정보는 본질적으로 언젠가는
다시 어딘가에서 내뱉을 수밖에 없는 성격을 갖고 있고,
그 과정에서 내 성장과 독립성을 돕기보다는,
내 기준과 주관을 흔드는 방해 요소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특히 독립성을 세워야 하는 시기에 이런 정보에 기대기 시작하면,
나는 내 머리로 판단해서 내 발로 서는 과정을 놓치게 된다.
결국 정보 제공자에게 심리적·정서적 종속성이라는 족쇄를 차게 되고,
그 사람은 나 위에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할 지렛대를 하나 더 쥐게 된다.
그렇기에 나는 이런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왜 이 사람은 지금, 이 타이밍에, 굳이 나에게 이 정보를 흘릴까.
그가 이 정보를 흘림으로써 얻는 이득은 무엇인가.
이 이득은 인간적인 호의의 차원을 넘어서, 조직 내 입지·경제적 이해와 연결되어 있지 않은가.
물론 그중에는 진심으로 도와주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불안도가 높고, 동시에 독립성에 대한 욕구가 강한 성향을 갖고 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먼저 다가오는 친절과 정보 제공의 의도를 의심하는 쪽으로 기울게 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내가 정보를 대할 때 내용의 진위보다 먼저, 그것을 둘러싼 의도와 이해관계를 본다는 점이다.
이 “의도 읽기”의 습관이 자연스럽게 기업 전략, 국가 정책, 대외정책을 해석하는 방식으로 확장된다.
3. 의도 읽기의 확장: 젠슨 황, RE100, 국내 정책
이제 같은 렌즈를 기업·국가의 행위에 적용해 본다.
젠슨 황의 GPU 26만 장 계약(일명 ‘깐부회동’) 은 겉으로 보면 “웃돈을 줘도 못 구하는 GPU를 한국이 받았다”, “한국의 제조 경쟁력에 대한 신뢰”라는 상징성으로 포장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이 장면의 본질은 한국 제조업에 대한 신뢰와 동맹 의지라기보다,
향후 AI 시대에 필수적인 메모리 물량을 선제적으로 묶어 두려는 젠슨 황의 계산된 의도에 가깝다.
순수 한국 제조업에 대한 신뢰였다면, 굳이 한국에만 이렇게 우호적일 현실적인 이유는 없다.
정보를 먼저 흘려주는 사람을 의심하듯, 여기서도 **“왜 지금, 왜 한국, 무엇을 얻기 위해”**라는 질문을 먼저 던져본다.
결국 이 행위는 “친한 척”과 “칭찬”의 포장지를 씌운 자기이익 극대화 전략으로 보는 편이 현실적이다.
유럽의 RE100, 환경부담금도 마찬가지이다.
겉으로는 기후·환경을 위한 규범을 자처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한국 같은 역외 국가에 사실상의 국경세·관세를 부과하고,
이를 통해 자기 산업을 보호하고 재정적자를 메우는 수단으로 작동한다.
국내 정책도 예외는 아니다.
기후부의 친환경 에너지 전략,
반도체 산단의 호남·새만금 이전 논의 등은
산업 현실·공급망·인력·인프라·물류를 감안할 때 논리와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 주장임에도,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이를 나는,
“국가 전체의 장기 최적”이 아니라,
특정 집단이 자신들의 이해를 최우선으로 관철하는 집단 이기주의의 발현으로 해석하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고 본다.
이 지점에서, 개인 관계에서 느끼는 것과 같은 패턴이 반복된다.
힘들고, 결핍감을 느끼는 집단일수록,
자신들의 몫을 극단적으로 챙기려는 방식으로 정책과 담론을 설계한다.
그리고 그 비용은 다른 집단·다음 세대·국가 전체가 나눠 떠안게 된다.
4. 중국: 구조적 불안과 집단 이기심의 정치적 형태
이제 시선을 중국으로 옮겨 본다.
표면상 시진핑은 외교무대에서 중국을 대표하고 있으나,
나는 그의 실질적 통치력과 중앙집권 장악력이 약해지고 있다고 본다. 그 배경에는
그간 잘못 설계된 경제·통화정책,
공동부유라는 구호 아래 장기간 지속된 디플레이션 및 경제 사회불안,
그 결과로 인민과 지방정부에 대한 실질적 장악력 상실
이 놓여 있다.
여기서 다시 불안과 결핍의 문제가 등장한다.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미래에 대한 기대가 꺾인 사회일수록,
개인과 국가는 자기 이익을 집요하게 최우선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타인의 자유와 기본권 침해,
타국의 정당한 이익을 침해하는 행위
가 쉽게 정당화된다.
내가 이해하는 중국은, 자본주의 세계의 기준에서 보았을 때
자유권·평등권·재산권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고,
기술 탈취와 보조금에 의한 시장왜곡을 상시적으로 행해 왔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술 발전 속도는 미국 다음으로 빠른 국가이다.
특히 공산당 체제는 구조적으로 개인 재산권을 완전하게 보장하기 어렵다.
사회 불안이 높아질 수밖에 없는 토양이 내재해 있다는 뜻이다.
개인 재산권을 광범위하게 인정한다는 것은,
공산당이 그동안 누려온 이권과 권력을 인민에게 실질적으로 이전한다는 의미에 가까우며
이는 실현가능성이 없다.
따라서 지도자가 교체되더라도
사회 불안이 의미 있게 낮아질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판단한다.
이 지점에서 중국은 아이러니한 모습을 드러낸다.
표면적으로는 공동부유와 사회주의 노선을 표방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오히려 어떤 자본주의 국가보다
사회불안도가 높아 자본주의 재산권의 근간이 되는 이기심의 발현이 그 어떤 자본주의 사회보다 강하게 구조화된 사회일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재산권, 권리보장과 같은 제도가 약한 중국에서의 높은 내부 불안은, 외부 팽창·기술/산업 침투 약탈과 같은 방식으로 분출 된다는 것이다.
단기적으로는
중국인 관광객,
한한령 완화에 따른 문화·관광 산업의 반짝 호조
라는 이득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중장기적으로는
한국 산업에 대한 공격적인 잠식,
황해 인근 구조물 건설과 해양·군사력 확장을 통한 안보 위협 심화
와 같은 결과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실제로 국내 중소기업·자영업자들이 중국의 기술탈취·보조금 기반 불공정 경쟁으로, 일자리를 잃고 생계의 벼랑 끝에 몰리는 사례들이 계속 포착되고 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미국과 일본처럼 관세 및 보호무역 장벽을 구축해 내수·중소기업·자영업을 보호하는 전략이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도 현 정권은 이미 여러 차례 검증된 ‘반복된 오판’을 다시 되풀이하고 있다.
중국의 거대한 소비시장에 대한 수출 환상에 기대어 접근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미국과 유럽은 물론, 일본 역시 바보가 아니다.
정유·화학·철강·태양광·자동차·배터리에서 시작해, 이제는 화장품과 반도체에 이르기까지 각국의 주요 기업과 산업이 중국 시장에서 발을 빼고 있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현 정권의 반복되는 패턴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 보인다.
문제의 1차적인 원인은 세상의 변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점이고,
2차적인 원인은 정책이 가져다주는 당장의 이점에만 과도하게 집중한 나머지, 그로 인해 파급될 중·장기적인 부정적 효과를 심각하게 과소평가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기준에서 이들은 불안심리가 지나치게 낮다고 느껴진다.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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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에서 ‘수 계산’이 너무 느려 상황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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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반대로 다 알고도 자신의 정치적·집단적 이익을 최우선하는,
다른 의미의 이기적인 불안만 극도로 높은 집단
둘 중 하나이지 않을까 싶다.
5. 힘과 외교: 일본의 선택, 한국의 선택
이 지점에서 나는 **“평화, 안정, 실리외교”**라는 말을 거의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실질적인 무력과 경제력, 그리고 이를 사용할 의지가 없는 평화 담론은
국제정치 현실에서는 거의 아무 가치도 갖지 못하는 수사에 가깝다.
오히려 오늘날 일본이 취하고 있는,
중국과 명확히 거리를 두고 견제하는 노선이
국가 안보,
산업 경쟁력,
대외 협상력
측면에서 장기적으로 더 이득일 수 있다고 본다.
반면, 한국이 중국과 가까워지며
“자유, 평화, 공동안보”를 말하는 모습은
중국 입장에서는 물론, 일본과 미국의 입장에서도
전략적으로 느슨하고 만만한 상대로 비칠 위험이 있다.
6. 처칠, 루즈벨트, 스탈린이 보여준 것: 힘과 캐릭터의 결합
최근 읽은 윈스턴 처칠 일생을 서술한 책에서 묘사된
알타 회담 준비 당시의 루즈벨트·스탈린·처칠의 대비는 인상 깊었다.
루즈벨트: 어느 정도 의기소침하고 우유부단한 인물,
스탈린: 약삭빠르고 소련의 이익을 최우선하는 영민한 인물,
처칠: 옳은 말을 자주 하지만 감정적이고 성급하며,
양대국 사이에서 실질적 발언권이 상대적으로 약한 인물.
이 장면에서 내가 얻은 교훈은 두 가지이다.
첫째, 옳은 말을 하고 명확한 비전을 제시하더라도,
이를 뒷받쳐 줄 1차적인 무력과 상대에게 부담을 줄 경제적 영향력이 없다면
그 말은 결국 공허한 소리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둘째, 반대로 충분한 군사력과 경제적 영향력이 있다 하더라도,
그 힘을 대변하는 지도자에게
결단력,
정상 개인의 캐릭터,
상대방의 계산된 의도를 간파해 내는 능력
이 결여되어 있다면,
국제외교의 장에서 실질적인 실리를 얻기는 매우 어렵다는 점이다.
정리하면, 외교의 성패는
국가가 가진 힘(군사력·경제력)이라는 하드웨어,
그 힘을 어떻게 쓰고 읽는지에 대한 지도자의 캐릭터·결단·통찰이라는 소프트웨어,
이 두 요소의 곱으로 결정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결국, 힘이 있어도 사용할 의지와 능력이 없으면 효과는 0에 수렴한다. 반대로 지도자의 통찰과 결단이 뛰어나도 뒷받침할 힘이 없으면 영향력은 본질적으로 제한된다.
이 틀을 현재 한국에 대입해 보면,
지금의 좌경화 정권과 여타 정치 지도자들이
정말로 국민의 실질적 이익과 국가의 장기발전을 대변하고 있는지,
혹은 특정 집단의 이해에 더 치우쳐 있는지,
그리고 설령 그들이 옳은 말을 한다 하더라도,
- 이를 뒷받침할 실질적인 힘,
- 그 힘을 적절히 행사할 캐릭터와 결단력
을 갖추고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7. 좌파적 분배 담론과 성장 저해, 그리고 나의 불안
한국에서 제기되는
RE100,
각종 친환경 발전 중심 전략,
분배를 통한 성장론,
지역격차 해소를 명분으로 한 산업·시설 이전,
이러한 것들은 모두 분배의 정당성을 전면에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성장과 효율성을 저해하는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내가 보기에 이는
“환경”과 “정의”를 내세운 도덕 담론의 껍데기 속에,
특정 집단의 경제적·정치적 이득을 우선하는 집단 이기심이 숨어 있는 구조이다.
나는 원래 불안도가 높고, 독립성을 강하게 중시하는 성향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이런 정책들을 바라볼 때
이 정책은 누구의 이익을 위해 설계되었는가,
그 과정에서 어떤 집단의 정당한 이익과 기본권이 침해되는가,
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글로벌 차원에서도 **부의 총량(파이)**은 여전히 커지고 있지만,
성장 속도는 둔화되고 있고, 그 안에서 미국과 중국이 AI를 기반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며
파이 안의 점유율을 빠르게 키워 가고 있다.
이론적으로는 이 구조가 제로섬 게임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중국이 보여 온 행태를 보면,
실제로는 타국의 기본권과 이익을 침해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이익을 관철해 온 이력이 분명 존재한다.
개인적인 롤모델인 찰리 멍거, 리콴유 등의 저술에서도 좌경화 정권의 정책들은 현실과 괴리가 있었고, 장기적으로 성장을 저해해 왔다는 지적이 반복된다.
그 문장들이 지금의 한국과 세계 상황에 정확히 겹쳐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8. 자유무역 체제, IEEPA, 그리고 힘을 통한 질서
곧 IEEPA 관세 판결이 다가온다.
일부 시각은, 관세라는 경제적 무력을 행사할 권한을 소수(트럼프 같은 인물)에게 집중시키는 것이
무너진 무역 질서를 다시 세우고,
안보와 경제질서를 동시에 관리하는 보다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본다.
지금까지의 성과를 보면, 과거의 다자간 자유무역 체제는
겉으로는 자유·공정경쟁을 말했지만,
실제로는 중국과 같은 권위주의·독재 체제에 유리한 구조를 제공했고,
주변 무역국들에게는 산업 공동화와 일자리 축소라는 부작용을 안겨 주었다.
이 점에서, 오히려 미국 일극 체제와 힘을 기반으로 한 질서가 글로벌 정세와 지정학적 안보에 더 유리한 결과를 가져왔다는 평가를 완전히 부정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9. 정리: 불안, 의도, 힘이라는 하나의 축
결국 이 글은, 내 불안에서 출발해 세계를 해석하려는 시도이다.
정리해 보면, 내가 보는 세계는 다음의 하나의 축으로 묶인다.
불안과 결핍이 커질수록 이기심이 강화되고,
그 이기심은 의도와 정보, 정책과 외교의 형태로 모습을 바꾸며,
그 과정에서 힘(무력·경제력)과 지도자의 캐릭터가
각 국가와 집단이 얻는 실질적 실리의 범위를 결정한다.
개인 차원에서는,
먼저 다가오는 친절과 정보가 나에게 독이 든 사과로 보이는 이유이고,
국가 차원에서는,
친환경·평화·공정·공동안보라는 말들이
실질적인 힘과 결합되지 않을 때
얼마나 쉽게 공허한 수사, 혹은 타 집단의 이익을 가리는 장막으로 전락하는지를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간 어딘가에서,
나는 여전히 불안한 눈으로, 그러나 독립적인 기준을 유지하려는 시도로
각 행위자의 의도와 힘의 구조를 읽어 보려고 하고 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보면 나의 높은 불안도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찾고 생각하게 만드는 힘으로 작용해왔으며, 결과적으로는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하나의 원동력이 되어 준 측면이 있다고 보고있다.
마찬가지로 주변에서 불안도가 높아 보이던 사람들 역시 함께 지내거나 일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시간을 두고 돌아보면 대체로 어떤 방식으로든 뚜렷한 성과를 만들어낸 사람들로 기억된다.
조직 차원에서도 불안도가 높아질수록, 실제 성과를 만들어 내는 소수에게 의존하려는 경향이 강화되는 모습을 자주 보아 왔다.
마찬가지로 글로벌 정세가 더욱 혼잡해지고 질서가 흔들릴수록, 세계는 미국, 보다 구체적으로는 트럼프가 상징하는 미국 일극 패권에 더욱 기대려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될지도 모르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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