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문화, 납득, 그리고 환경의 힘
최근 즐겨 보던 주식·자산운용사 관련 판타지 웹소설이 아쉽게도 비공개로 전환되었다.
그 작품에는 ESG와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명분으로 자산운용사가 기업에 변화를 요구하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처음에는 웹소설 속 하나의 장면으로 가볍게 읽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 그 이야기가 예전 직장생활에서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있던 경험과 겹쳐 보였다.
그때의 감정이 다시 떠올랐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그 기억을 바탕으로 조직문화, 일하는 방식, 그리고 개인의 커리어에 대한 생각을 기록해보고자 한다.
개인적으로 조직은 지시와 압박만으로 오래 유지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업무를 잘해내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구성원들이 그 일을 스스로 납득하고 움직일 수 있는 분위기라고 느낀다. 아무리 방향이 옳고 목표가 좋아도, 그것이 일방적인 방식으로만 전달되면 조직 안에는 서서히 피로감이 쌓이기 마련이다.
예전에 몸담았던 운용사에는 ROE라는 지표를 매우 중요하게 보는 매니저가 있었다. ROE는 기업을 분석할 때 분명 중요한 지표이다. 기업의 수익성과 자본 효율성을 판단하는 데 필요한 기준이기도 하다.
다만 기업을 바라볼 때는 ROE 하나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요소들이 많다. 기술에 대한 이해, 산업의 경쟁 구도, 장기 성장성, 거시환경 변화, 경영진의 자본배분 능력 등이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당시에는 이런 다양한 맥락보다 특정 지표에 대한 강조가 더 크게 느껴졌고, 그 과정에서 주니어 직원들이 감당해야 하는 부담도 적지 않았다.
그 부담은 시간이 지날수록 조직의 분위기에도 영향을 주었다. 구성원들 사이에는 피로감이 누적되었고, 주니어 직원들끼리는 자연스럽게 업무 방식에 대한 아쉬움을 나누는 일이 많아졌다. 능력 있는 사람들 중 일부는 더 잘 맞는 환경을 찾아 하나둘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그 시기는 특정한 한 사람의 문제로만 설명하기 어렵다. 오히려 조직 안에서 신뢰와 소통 방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체감했던 시간에 가까웠다.
당시에는 불필요한 요청을 받아줄 사람이 점점 줄어들다 보니, 자연스럽게 일이 내게 몰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메일이 오면 내용을 확인하기도 전에 마음이 무거워졌던 기억이 있다. 나 역시 최선을 다하려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일의 의미를 충분히 납득하기보다 요구되는 수준에 맞춰 기계적으로 자료를 만들어내는 데 집중하게 되었다.
업무를 처리할 수 있는 환경 자체가 부족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블룸버그 단말기와 데이터가이드 같은 유료 데이터 툴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필요한 자료를 찾고 정리하는 일은 어느 정도 가능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마음속에는 한 가지 질문이 남았다. 이 일을 왜 하고 있는지, 이 과정이 나와 조직 모두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답을 찾기 어려웠다. 결국 업무의 양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그 일을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한 공감이 부족했다는 점이었다.
이 경험을 떠올리다 보니 최근 한국 시장에서 전개되고 있는 ESG와 기업지배구조 개선 논의도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기업 오너와 이사회에 변화를 요구하고, 그 뒤에서 관련 논리와 자료를 준비하는 운용사 내부 구성원들 역시 각자의 위치에서 적지 않은 부담과 복잡한 감정을 느끼고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의 성향과 조직의 문화는 단기간에 쉽게 바뀌지 않는다. 개인에게 오랜 시간 축적된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이 있듯, 기업에도 긴 시간에 걸쳐 형성된 문화와 의사결정 방식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외부에서 변화를 요구할 때는 그 조직이 지나온 시간과 맥락을 함께 이해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동시에 타자가 요구하는 변화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을 넘어서는 일 자체가 결코 쉽지 않다는 점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운용사 내부 직원 입장에서도 상황은 단순하지 않다. 회사의 방향과 상사의 지시에 따라 맡은 일을 수행해야 하지만, 그 일이 자신의 커리어와 가치관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겉으로는 주어진 역할을 해내고 있어도, 마음 한편에서는 전혀 다른 고민을 하고 있을 수 있다.
결국 일은 직책으로 수행하지만, 커리어는 개인의 납득과 방향성 위에서 쌓여간다.
특히 지금은 AI가 산업과 생태계 전반을 빠르게 바꾸고 있는 시기이다. 기업분석과 투자업계 역시 예외가 아니다. 데이터 처리 방식, 리서치 방법론, 산업의 성장축이 모두 달라지고 있다. 이런 큰 변화의 한가운데에서 개인이 어디에 시간을 쓰고,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 점에서 AI가 만들어내는 거대한 변화의 시기에, 누군가의 성향과 조직문화에 정면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는 문제를 다루는 일이 투자업에 발을 들인 사람들에게 얼마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 생각하게 된다.
특히 본질적으로 기업과 산업을 분석하고, 좋은 투자기회를 찾는 일을 좋아해 이 업계에 들어온 사람이라면 더욱 그럴 수 있다. 갈등과 법적 공방의 성격이 강한 업무를 계속 감당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고민을 느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런 생각을 글로 남기는 나 역시 누군가의 일을 바깥에서 쉽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다. 다만 웹소설 속 에피소드를 읽다가 오래전 경험이 떠올랐고, 그때 느꼈던 피로감과 고민이 지금의 여러 장면과 겹쳐 보여 이렇게 기록으로 남겨본다.
사람은 자신이 속한 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과 일하는지, 어떤 언어를 주고받는지, 어떤 기준이 반복되는지에 따라 생각과 태도도 조금씩 달라진다. 좋은 환경은 사람을 성장시키지만, 피로가 누적되는 환경은 사람을 서서히 지치게 만든다.
그래서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고 느끼거나, 자신이 속한 조직과 환경이 기대했던 방향과 다르게 흘러가고 있음을 인지했다면, 그 사실을 빠르게 인정하고 다른 길을 모색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방향만 고집스럽게 붙잡기보다, 지금의 선택이 나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차분히 돌아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결국 오래 지속되는 관계와 조직은 강한 지시보다 신뢰, 압박보다 납득, 명분보다 진정성 위에서 만들어진다.
마지막으로 쇼펜하우어의 『인생수업』에서 좋아하는 문구로 글을 마무리해본다.
모든 사물은 원래 무색무취로 세상에 나오지만,
무엇과 함께 있었는지에 따라 그 향과 냄새를 지닌 존재로 바뀐다.
향을 쌌던 종이는 시간이 지나도 향기를 품고,
생선을 꿰었던 새끼줄은 아무리 씻어도 비린내를 버리지 못하듯이 말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어떤 인연과 환경 속에 오래 머무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과 결이 조금씩 달라진다.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의 총합이 내 미래가 된다.
그들의 말투가 나의 말투가 되고,
그들의 방식이 나의 습관이 되며,
그들의 수준이 나의 미래가 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환경에 머물고 있는지, 그리고 내 곁에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돌아보는 일이다.
지금 내 주변의 사람들이 나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고 있는지,
나 역시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고 있는지 한 번쯤 차분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않나 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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