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8월 27일 목요일

생각정리 354 (* 2027년 한국 경제 전망)


최근에는 이례적인 매크로 환경과 정치권의 여러 변수가 동시에 맞물리면서, 공부하고 생각을 확장하기에는 흥미로운 시기가 이어지고 있다. 주식시장의 변동성이 커진 탓에 피로감도 상당하지만, 하나씩 정리해갈수록 앞으로의 방향은 오히려 조금 더 선명해지는 듯하다.

이전 글에 이어 이번에는 향후 대한민국의 내수 경기와 자산시장, 그리고 이를 움직일 주요 매크로 변수를 중심으로 지금까지의 생각을 정리해 기록해본다.

성장은 높아지는데 돈은 돌지 않는다


2027년 한국 경제의 명목성장·고금리·주거비·양극화 시나리오


2027년 한국 경제를 전망할 때는 실질 GDP 성장률만 봐서는 전체 모습을 이해하기 어렵다. 반도체 투자와 정부지출이 명목 GDP를 끌어올리는 반면, 주거비와 서비스 물가는 금리를 높은 수준에 묶어둘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예상하는 2027년의 중심 구도는 명목 GDP 성장률 5% 안팎을 기준으로, 조건이 충족되면 6%대, 예외적으로 7%에 근접하는 경제다. 이 과정에서 높은 명목성장률 g와 높은 이자율 r이 공존할 가능성이 있다.

M2가 명목 GDP보다 빠르게 증가하면 시중 유동성의 총량은 늘어난다. 그러나 높아진 이자비용과 저축 선호로 통화유통속도는 오히려 낮아질 수 있다.

문제는 성장의 분배다. 반도체 성과급과 자산가격 상승은 특정 산업과 자산 보유 계층에 집중되는 반면, 변동금리 차입자와 임차가구는 이자와 주거비를 동시에 부담하게 된다.




1. 매매·전세·월세가 함께 오르는 주택시장


현재 주택시장의 특징은 매매가격만 상승하는 것이 아니다. 주택담보대출과 전세대출, 다주택자 규제가 매매와 임대 공급을 동시에 제한하고 있다.

정부 정책의 목적은 가계부채와 갭투자를 억제하는 데 있다. 그러나 신규 공급이 부족한 상태에서 금융 규제가 먼저 강화되면 기존 주택 소유자는 매물을 거둬들이고 임대인은 전세를 월세나 반전세로 전환할 유인이 커진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전세제도를 폐지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정책의 누적된 결과가 전세 공급 감소 → 보증부 월세 증가 → 임차인의 월 현금지출 확대로 이어진다면 실질적으로는 전세의 점진적 축소를 촉진할 수 있다.

전세대출 규제는 전세 수요를 줄이는 효과도 있다. 그러나 자가 매입으로 이동하기 어려운 가구가 많다면 주거 수요는 사라지지 않고 월세와 외곽 지역으로 이동한다.

여기에 2027년부터 서울 주요 재건축 단지의 이주가 본격화될 가능성이 있다. 은마아파트는 4,424가구 규모로 2027년 상반기 이주가 목표로 거론되고 있다.

여의도와 목동의 다른 단지까지 비슷한 시기에 이주하면 문제는 개별 단지의 규모가 아니라 이주 일정의 중첩이 된다. 수천 가구가 단기간에 전세를 구하면 인접 지역의 임차료가 빠르게 상승할 수 있다.

은마아파트, 내년 상반기 이주 목표…4424가구 대이동 예고


전세난에 세제 변수까지…이주 앞둔 여의도·목동 재건축 '비상'

강남과 여의도의 전세 부족은 동작·광진·성동·마포로 확산될 수 있다. 과천과 분당 등 수도권 주요 주거지역도 대체 임차 수요의 유입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재건축 이주 일정은 인허가와 이주비 대출, 조합 내부 사정에 따라 지연될 수 있다. 따라서 2027년에 시작해 2028년으로 확대될 수 있는 다년간의 임대시장 충격으로 보는 편이 합리적이다.


참고자료: 은마아파트 2027년 이주 계획, 여의도·목동 재건축과 전월세 수급, 서울시 정비사업 이주비 관련 설명

(*2027년 하반기 부터 국내 전월세 시장은 본격 퍼펙트 스톰을 맞이하게 되지 않을까 한다.)


 2024년 입주를 시작한 거주의무 대상 아파트들의 '3년 카운트다운'이 내년부터 차례로 끝나


전세 줄고 월세 늘자…한국, 아태 주거 투자 선호 4위



2. 주거비 상승은 어떻게 소비자물가로 전이되는가


한국 소비자물가지수에는 주택 매매가격이 직접 포함되지 않는다. 대신 전세와 월세 등 실제 임차료가 소비자물가에 반영된다.

아파트 매매가격이 오른다고 소비자물가가 즉시 상승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매매가격 상승 → 전세·월세 상승 → 소비자물가 반영의 간접적인 경로가 존재한다.

2022년 기준 소비자물가 가중치에서 주택·수도·전기·연료 항목은 전체의 **17.16%**다. 전세와 월세의 합산 가중치는 약 **9.91%**다.

전국 평균 임차료가 5% 오르면 다른 조건이 같을 때 소비자물가를 약 0.5%포인트 끌어올릴 수 있다. 임차료 상승률이 8~10%에 이르면 직접 기여도는 약 0.8~1.0%포인트다.

다만 서울의 전월세 상승률이 그대로 전국 소비자물가에 반영되는 것은 아니다. 지역별 가중치와 임대차계약 갱신 시차 때문에 상승 효과가 분산된다.

이러한 시차는 통화정책에 오히려 부담이다. 전세와 월세는 계약 갱신을 거치면서 상승분이 장기간 누적되는 경직적인 물가 항목이기 때문이다.

주거비가 개인서비스 가격과 임금 요구를 자극하면 근원물가도 쉽게 내려가지 않는다. 국제유가가 안정돼도 국내 주거비와 서비스 물가는 높은 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

2026년 7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8%, 근원물가는 2.6%였다. 한국은행은 비용 충격과 수요 압력으로 물가가 상당 기간 목표치를 웃돌 것으로 전망했다.

한국은행의 공식 물가안정 목표는 미국식 PCE가 아니라 **소비자물가 상승률 2%**다. 명목 GDP와 실질 GDP를 연결하는 물가지표는 CPI가 아니라 GDP 디플레이터다.

따라서 주거비가 명목 GDP에 미치는 영향은 임차료 상승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임대료 상승이 서비스 가격·임금·건설비로 확산될 때 GDP 디플레이터와 명목 GDP도 함께 상승한다.


참고자료: 소비자물가지수 가중치와 산정 방식, 2026년 7월 소비자물가 동향, 한국은행 2026년 8월 통화정책방향


3. 2027년 명목 GDP 성장률 전망과 주요 조건


2027년 명목 GDP 성장률을 전망하려면 실질 GDP 성장률과 GDP 디플레이터를 구분해야 한다. 명목 GDP는 실질 생산의 증가와 국내 가격의 상승이 결합된 결과다.

한국은행은 2027년 실질 GDP 성장률을 **2.9%**로 전망했다. 소비자물가 전망은 2.3%, 근원물가 전망은 2.5%다.

CPI와 GDP 디플레이터는 다른 지표다. 다만 국내 수요와 서비스 가격, 임금, 건설비가 함께 오르면 GDP 디플레이터도 소비자물가와 비슷하거나 더 높은 상승률을 기록할 수 있다.

GDP 디플레이터가 2% 안팎이면 명목 GDP 성장률은 대체로 5% 안팎이다. 디플레이터가 3% 수준으로 높아지면 명목 성장률은 6%에 가까워질 수 있다.

명목 성장률이 7%에 도달하려면 실질 성장률이 3%를 넘고 GDP 디플레이터도 3% 후반까지 상승해야 한다. 따라서 명목 GDP 7%는 기준 전망이 아니라 상당히 강한 상방 시나리오다.

상방 요인으로는 반도체 수출과 설비투자 확대가 있다. 관련 팹과 전력망, 건설투자까지 늘어나면 반도체 호황의 국내 부가가치 파급효과도 커진다.

정부소비와 공공투자 확대도 명목 GDP를 높일 수 있다. 그러나 이전지출·연금·보조금·이자지급은 정부지출에 포함돼도 GDP에 직접 더해지지 않는다.

반도체 설비투자도 전체 금액이 국내 GDP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수입 장비와 원자재가 늘어나면 투자 증가 효과의 일부가 수입 증가로 상쇄된다.

한국은행이 2026년 6월 발표한 잠정 국민계정에서 2025년 명목 GDP는 2,676.7조원이었다. 이 기준에서 160조원 증가는 약 **6.0%**다.

그러나 2026년 GDP가 5~6% 추가 성장한 뒤라면 160조원 증가는 약 **5.6~5.7%**에 해당한다. 2027년 명목 성장률 7%를 달성하려면 대략 200조원의 실제 부가가치 증가가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5% 안팎이 기준 시나리오다. 반도체와 재정, 주거비가 모두 강하게 작동하면 6%대, 예외적인 경우 7%에 근접할 수 있다.


참고자료: 한국은행 2024년 확정·2025년 잠정 국민계정, 한국은행 경제전망


4. 명목 GDP와 M2는 증가하지만 돈의 회전은 느려진다


2027년에는 명목 성장률 g와 이자율 r이 동시에 높아질 수 있다. 경제성장률이 높다고 해서 돈이 반드시 빠르게 순환하는 것은 아니다.

명목 GDP는 통화량과 통화유통속도의 곱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는 인과관계라기보다 통화량과 명목지출 사이의 사후적인 관계를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M2와 명목 GDP의 상대적인 증가 속도다. M2가 8~10% 증가하고 명목 GDP가 6~7% 성장하면 통화유통속도는 하락한다.

금리가 오르면 가계와 기업은 소비보다 예금과 금융상품을 선호한다. 정기예금은 M2에 포함되므로 광의통화가 늘어나도 실제 지출 속도는 느려질 수 있다.

높아진 이자비용도 같은 방향으로 작용한다. 변동금리 차입자는 명목소득이 증가해도 상당 부분을 이자로 지출해야 한다.

차입자에게서 예금자와 금융기관으로 이전된 돈은 소비보다 저축과 금융자산에 머물 가능성이 높다. 그 결과 총량지표는 개선되지만 내수 체감경기는 약한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다만 금리 상승이 M2 증가를 자동으로 보장하지는 않는다. 높은 금리는 은행대출과 신용창출을 둔화시켜 M2 증가율을 낮출 수도 있다.

따라서 M2 증가와 통화유통속도 하락이 동시에 발생하려면 조건이 필요하다. 재정지출과 명목소득 증가 효과가 고금리의 신용 위축 효과보다 커야 한다.

한국은행은 2026년 8월 기준금리를 2.75%에서 3.00%로 인상했다. 높은 성장세와 물가, 수도권 주택가격과 가계대출이 주요 근거였다.

확장재정으로 국채 발행이 늘어나면 장기 국고채금리도 높은 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 결국 재정은 완화적이고 통화정책은 긴축적인 정책 조합이 형성될 가능성이 있다.

금리 상승은 원화 강세와 수입물가 안정에 기여할 수 있다. 그러나 환율은 미국 금리와 달러 방향, 국제유가, 경상수지와 외국인 자금 이동에 의해서도 결정된다.

일본도 금리 정상화와 엔화 약세 완화를 추진하고 있다. 다만 금리를 결정하는 주체는 일본은행이며, 정부와 중앙은행의 목표가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주: 통화유통속도 변화는 이해를 위한 단순 시나리오이며 공식 전망치가 아니다.

참고자료: 한국은행 2026년 8월 기준금리 결정, 일본은행 경제·물가 전망


5. 반도체 성과급과 자산가격이 만드는 새로운 양극화


명목 GDP가 6~7% 성장해도 과실이 모든 가계에 균등하게 돌아가지는 않는다. 산업·지역·자산 보유 여부·부채 구조에 따라 체감경기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첫 번째는 임금과 성과급의 격차다. 반도체 업황이 강하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일부 협력업체 종사자는 높은 성과급과 임금 상승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내수 서비스업과 건설업, 자영업은 상황이 다르다. 이들은 임대료·이자비용·인건비 상승을 동시에 부담해야 한다.

같은 명목 GDP 성장률 아래에서도 가처분소득은 전혀 다르게 움직일 수 있다. 반도체 성과급이 집중되는 지역에서는 소비와 주택 수요도 상대적으로 강해질 가능성이 있다.

두 번째는 자산 보유 여부에 따른 격차다. 반도체 이익과 명목성장, 유동성 확대는 주식과 핵심 지역 부동산 가격을 지지할 수 있다.

자산 보유자는 자본이득과 배당, 예금이자를 얻는다. 반면 무주택자는 상승한 전세와 월세를 부담한다.

세 번째는 부채 구조에 따른 격차다. 금융자산이 많고 부채가 적은 가계는 높은 금리의 수혜자가 될 수 있다.

변동금리 주택담보대출을 보유한 가계는 반대다. 명목소득 증가분의 상당 부분이 이자로 빠져나갈 수 있다.

금리가 오른다고 모든 자산이 하락하는 것도 아니다. 이익 증가율이 금리 상승폭을 웃도는 반도체와 공급이 제한된 핵심 주거지는 상대적인 강세를 보일 수 있다.

지방 부동산과 한계기업, 고부채 자영업은 더 큰 압력을 받을 수 있다. 결과적으로 현금흐름과 희소성이 강한 자산으로 자금이 집중되는 선택적 상승장이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

정부는 금리 인상을 용인하면서도 취약차주 지원과 정책금융을 확대할 수 있다. 이러한 대응은 단기 부담을 낮추지만 재정지출과 국채 발행을 다시 증가시키는 요인이 된다.


주담대 금리 연 8% 뚫릴 수도…영끌족, 이자폭탄 공포



결론: 강한 숫자와 약한 체감경기의 공존


2027년 한국 경제의 핵심은 단순한 고물가나 고금리가 아니다. 반도체와 재정이 명목 GDP를 높이는 동안 주거비와 서비스 물가는 금리를 높은 수준에 묶어둘 수 있다.

명목 GDP 성장률은 5% 안팎이 기준선이다. 반도체와 재정, 물가가 모두 강하게 작동하면 6%대, 예외적으로 7%에 접근할 수 있다.

M2가 명목 GDP보다 빠르게 증가하면 시중 통화량은 늘어난다. 그러나 높은 이자비용으로 소비가 제약되면서 돈의 회전은 느려질 수 있다.

반도체 종사자와 자산 보유자는 성장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반면 임차가구와 변동금리 차입자는 주거비와 이자를 동시에 부담한다.

정부는 물가와 원화 안정을 위해 초기 금리 인상을 용인할 수 있다. 그러나 가계부채와 자영업 부실 위험이 커지면 재정과 정책금융으로 충격을 완화하려 할 것이다.

그 결과 확장재정과 긴축통화가 동시에 유지되는 정책 조합이 나타날 수 있다. 이는 높은 명목성장률과 높은 이자율이 함께 유지되는 배경이 된다.

2027년 한국 경제는 높은 성장률과 기업 실적을 기록할 수 있다. 그러나 상당수 가계는 경기가 좋아졌다고 느끼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명목 GDP는 증가하지만 돈은 천천히 돌고, 물가는 오르지만 소비는 강하지 않다. 자산가격은 상승하지만 모든 자산과 계층이 함께 오르지는 않는 경제다.


이것이 2027년 한국 경제에서 가장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시나리오다.


#글을 마치며


이 글을 정리하며 문득 든 생각은 하나다. 지금과 같은 경로가 이어진다면 2027년에도 현 정권의 지지율이 의미 있게 회복될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행보를 고려할 때, 정권은 다시 한번 시중에 유동성을 공급하며 경기와 자산시장을 부양하려 할 가능성이 크다. 지지율 하락이 장기화될수록 그 방식은 이전보다 더욱 직접적이고 노골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정책의 초점은 정권에서 이탈한 2030 청년층과 서울 한강벨트의 재개발·재건축 자산 비중이 높은 5060 지지층으로 향할 가능성이 있다. 주식시장 부양과 부동산 규제 완화, 대출 및 정비사업 지원과 같은 자산시장 우호 정책이 2027년 2월 대법원 판결과 이후 예상되는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전후해 집중적으로 쏟아질 수 있다는 의미다.

결국 지지율을 회복할 다른 수단이 마땅치 않다면, 정권은 다시 한번 자산가격 상승을 정치적 동력으로 활용하려 할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우리가 다음으로 마주하게 될 것은 경기의 자연스러운 회복이 아니라, 정치적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또 한 번의 자산시장 붐일지도 모르겠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456264

=끝

2026년 8월 26일 수요일

생각정리 353 (* China’s Second Bill)

요즘 들어 중국에 관한 부정적인 이야기만 계속 기록하는 것 같아, 나 스스로도 어느새 편향된 시각에 빠진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그런데 비슷한 의구심을 품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라는 증거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중국이 저렴한 금융과 빠른 시공을 앞세워 제3국의 발전소·댐·항만·철도 등 핵심 인프라에 진입한 뒤, 부채와 하자, 추가 유지보수비, 기술인력과 부품 의존을 통해 장기간 영향력을 유지하는 사례가 반복적으로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일대일로의 위험 요인

물론 이를 근거로 중국이 참여한 모든 사업을 같은 방식으로 일반화할 수는 없다. 다만 ‘일대일로’와 개발협력이라는 명분 아래 확장된 중국의 인프라 사업이 실제로는 어떻게 발주국의 재정과 운영주권을 제약하고, 처음의 낮은 건설비보다 훨씬 가혹한 비용으로 돌아올 수 있는지는 충분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번 글에서는 중국 기업이 건설한 발전소와 수력발전소에서 발생한 하자·가동 중단·유지보수 의존 사례를 종합해, 중국의 인프라 장악 방식이 어떤 구조로 작동하며 발주국이 최종적으로 어떤 대가를 부담하게 되는지 기록해보려 한다.

값싼 전력 인프라가 보내는 두 번째 청구서


미국은 왜 중국산 전력망 장비를 신규 조달에서 배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미 설치된 설비까지 들여다보기 시작했나


OVERVIEW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026년 8월 26일 미국 대규모 전력망(Bulk-Power System, BPS)에 대한 외국의 공급망·사이버 위협을 국가비상사태로 규정했다. 첨단 제조업과 데이터센터, 인공지능, 방산 생산이 전력망에 의존하는 정도가 높아지면서, 변압기와 발전기 같은 물리적 장비뿐 아니라 소프트웨어·펌웨어·원격 유지보수 권한까지 국가안보의 일부로 보겠다는 선언이다.

이번 조치는 단순히 “중국산 장비를 더 이상 사지 않겠다”는 조달 규제가 아니다. 미국 에너지부는 위험하다고 판단한 기설치 장비에 대해 식별·격리·모니터링·접속 차단·교체·철거를 요구할 수 있다. 준공이 끝났더라도 공급업체가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핵심 부품 공급과 원격 유지보수를 장악하고 있다면 그 설비는 여전히 외국 공급망 안에 있다는 판단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갑자기 등장하지 않았다. 중국 기업이 건설한 발전소와 댐에서 반복된 하자와 가동 중단, 동일 시공업체에 대한 유지보수 의존, 전력 수입과 비상발전 비용을 살펴보면 미국이 왜 전력 장비를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장기간 존속하는 외국의 접근 권한으로 보기 시작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https://www.whitehouse.gov/presidential-actions/2026/08/declaring-a-national-emergency-to-secure-the-united-states-bulk-power-system/


1. 발전소의 가격은 준공식에서 확정되지 않는다


대규모 인프라 입찰은 대개 초기 EPC 가격과 금융조건을 중심으로 평가된다. 중국 기업은 중국 국유은행의 정책금융과 건설·장비·인력을 결합해 비교적 낮은 초기비용과 빠른 공기를 제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발전소와 송전망의 실제 비용에는 건설비와 금융비용뿐 아니라 하자보수비, 장기 O&M 비용, 가동 중단 손실, 대체 전력 구입비와 운영주권 상실 비용까지 포함해야 한다.

문제가 발생하면 발주국은 통상 세 번의 청구서를 받는다.

  • 첫 번째는 발전소를 건설하기 위해 받은 원금과 이자

  • 두 번째는 하자보수와 운영을 위한 추가 O&M 비용

  • 세 번째는 설비가 멈춘 동안 발생하는 전력 수입·비상발전·보조금·산업생산 차질


실제로 가장 큰 청구서는 시공업체가 제출하는 수리 견적서가 아닐 수 있다. 발전소가 멈추면서 발생하는 전력 수입비와 정전 손실, 전기요금 인상, 정부 보조금과 전력공기업의 재무 부실이 훨씬 클 수 있다.


2. 중국 시공 전력 인프라의 두 번째 청구서


2-1. 우간다 카루마댐: 준공 이후 다시 나온 4,000만 달러 제안서


중국 Sinohydro가 건설한 우간다의 600MW 카루마 수력발전소에는 약 14억 달러가 투입됐다. 그러나 나일강을 따라 유입되는 수초와 부유물이 취수구 스크린과 냉각수 계통을 막으면서 출력 제한과 발전기 정지가 반복됐다.

2026년 8월 현지 의회 조사 당시 6개 발전 유닛 가운데 2개가 두 달 넘게 가동을 중단한 상태였다. 발전소를 건설한 Sinohydro는 문제를 종합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비용으로 4,000만 달러, 약 1,479억 우간다실링의 추가 사업안을 정부에 제출했다.

우간다 측은 부유물 차단시설인 로그붐이 원래 설계에 포함돼 있었고 2019년 유실된 뒤 재설치되지 않았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반면 Sinohydro는 수초가 수백 킬로미터 상류에서 유입되는 등 실제 문제가 당초 설계조건보다 복잡해졌기 때문에 하자보수 범위를 벗어난 추가 사업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4,000만 달러가 확정된 하자보수 청구서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우간다 정부도 기술위원회를 구성해 책임 소재와 가격의 적정성을 검토하고 있다.

다만 이 사건이 보여주는 구조는 분명하다. 발전소가 충분한 출력을 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기술적 원인과 해결방법, 추가 사업비를 가장 잘 아는 주체가 원래 시공사라면, 발주국은 설비를 소유하고도 문제를 진단하고 고칠 수 있는 실질적 권한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일 수 있다.

카루마 수력발전소 일자별 경과



카루마 수력발전소 금액별 정리


출처: Daily Monitor – Karuma dam contractor wants additional Shs148b to fix defects

https://www.independent.co.ug/chinese-ugandans-fight-over-karuma-dam/



2-2. 우간다 이심바댐: 776개 보완사항과 끝나지 않은 구조적 하자


같은 우간다의 183.2MW 이심바 수력발전소는 중국국제수전공사(CIWE)가 건설했다. 총사업비는 5억6,800만 달러였으며, 이 가운데 85%를 중국수출입은행 대출로 조달했다.

우간다 감사원에 따르면 시공사에 통보된 776개 보완사항 가운데 763개는 처리됐지만, 주요 13개 항목은 2019년 이후에도 해결되지 않았다. 미처리 항목에는 방수로와 콘크리트 구조, 부유물 차단시설 등 발전소 안전과 직접 관련된 내용이 포함됐다.

2022년 8월에는 발전소가 침수돼 설비와 현장인력을 보호하기 위한 긴급 가동 중단이 실시됐다. 하자책임기간이 2023년 3월 종료됐음에도 주요 결함이 해결되지 않았고, 2025년 말에도 균열·부식과 추가 방수로 건설 문제가 제기됐다.

감사원은 하자 시정 지연이 사업비를 증가시키고 발전소 가동률과 정부의 전력 판매수입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발전소를 건설하기 위한 부채는 남아 있는데, 하자 때문에 발생하는 유지보수와 발전손실 비용이 다시 쌓이는 구조다.

이심바 수력발전소 일자별 경과


이심바 수력발전소 금액별 정리


출처: ChimpReports – Isimba Dam’s Major Defects Unrectified Since 2019
추가 자료: UG Standard – Cracks, corrosion and costly delays


Isimba dam: why does Uganda settle for less?


2-3. 보츠와나 모루풀레 B: 발전소 사업비보다 커진 사후 비용


보츠와나 전력공사(BPC)는 중국 CNEEC–SBW 컨소시엄과 600MW 모루풀레 B 석탄발전소 EPC 계약을 체결했다. 사업에는 중국공상은행(ICBC)의 8억2,500만 달러 대출이 투입됐으며, 송전 인프라를 포함한 총사업비는 약 120억 풀라였다.

하지만 BPC가 규제기관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발전소는 30년간 600MW의 안정적인 출력을 제공한다는 당초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BPC는 시공사가 계약상 의무를 이행하기 전에 발전소를 멈추겠다고 압박해, 2014년 6월 설비를 조기 인수했다고 설명했다.

인수 후 실시한 기술조사에서는 건설 및 장비 하자가 확인됐고, BPC와 시공사는 2016년과 2018년 두 차례 하자개선협약을 체결했다. 그럼에도 2019/20 회계연도 발전소 가동률은 **32%**에 불과했다. 이로 인해 전력 수입 비용은 예산보다 15억4,200만 풀라, 비율로는 231% 초과했다.

2025년 보츠와나 에너지장관의 의회 설명을 인용한 현지 보도에 따르면, 가동 이후 발생한 추가 직접비용은 O&M을 포함해 54억 풀라, 전력 수입과 발주자 기술자문을 포함한 간접비용은 189억 풀라로 제시됐다.

직접·간접비용을 합치면 243억 풀라로, 원래 사업비 120억 풀라의 두 배를 넘는다. 모든 비용을 중국 시공사가 청구한 것은 아니지만, 발전소의 낮은 가동률이 국가와 전력공사에 남긴 경제적 청구서라는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모루풀레 B 발전소 일자별 경과



모루풀레 B 발전소 금액별 정리


출처: Botswana Power Corporation 2021/22 Tariff Application, PDF
추가 자료: YourBotswana – 에너지장관 의회 설명 정리



2-4. 스리랑카 락비자야: 13억5,000만 달러를 지불하고도 이어진 O&M 의존


스리랑카의 900MW 락비자야·노로촌촐라이 석탄발전소는 중국기계설비공정공사(CMEC)가 약 13억5,000만 달러를 들여 건설했다. 2011년 첫 호기가 가동된 이후 2023년 초까지 20차례가 넘는 고장이 발생했다.

발전소가 고장 날 때마다 스리랑카는 출력 부족을 충당하기 위해 비싼 유류발전을 늘리거나 순환정전을 시행해야 했다. 2022년 8월 고장 때는 정전 시간이 하루 3시간까지 확대됐다.

더 주목할 부분은 준공 이후의 인력·유지보수 의존이다. 스리랑카 전력청(CEB)은 발전소 준공 후 10년 동안 CMEC와 약 6,700만 달러 규모의 운영·유지보수 자문계약을 체결했다. 첫 6개월 계약부터 인수 후에도 남아 있던 결함과 반복적인 고장을 이유로 체결됐다.

CEB 기술자들이 해외교육을 받았음에도 중국 기술자들은 약 10년간 현장 운영과 유지보수를 지원했다. 일부 계약은 사전 내각 승인 없이 체결돼 약 2,000만 달러의 지급 문제까지 발생했다.

스리랑카는 발전소를 완공하면서 자산의 소유권을 얻었다. 그러나 고장이 발생했을 때 누구를 불러야 하고 어떤 부품을 사용해야 하며 누가 설비를 재가동할 수 있는지까지 독립하지 못했다면, 운영주권은 완전히 이전되지 않은 것과 다름없다.

락비자야 발전소 일자별 경과


락비자야 발전소 금액별 정리


출처: Sunday Times Sri Lanka – CEB의 CMEC O&M 계약 조사
추가 자료: Daily Mirror – China-built Norochcholai Plant continues to suffer breakdowns

A Dark Side: Report on Norochcholai Power plant


2-5. 파키스탄 닐룸–젤룸: 무너진 터널을 원래 시공사가 다시 수리했다


파키스탄의 969MW 닐룸–젤룸 수력발전소는 중국 Gezhouba Group과 CMEC 컨소시엄이 건설했다. 약 52km의 지하 수로와 터널을 이용하는 고난도 프로젝트였지만, 완공 이후 핵심 터널에서 문제가 반복됐다.

2022년 7월 배수터널에서 이상 수압과 누수가 발생하면서 발전소 전체가 멈췄다. 당시 추정된 직접 복구비는 25억 파키스탄루피, 영업손실은 200억 루피였다. 복구공사는 원래 토목 시공사였던 중국 Gezhouba Group이 다시 맡았다.

2024년 5월에는 도수터널에서 다시 문제가 발생해 발전소가 장기간 가동을 중단했다. 파키스탄 감사원은 5,070억 루피가 투입된 사업이 계획과 집행 측면에서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으며, 터널 결함과 붕괴가 설계 및 시공 품질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한다고 평가했다.

2026년 공개된 추가 감사 결과에 따르면 2022/23~2024/25 회계연도의 영업중단 손실은 991억8,000만 루피로 추정됐다. 2024년 5월 이후 발전소는 계속 가동하지 못했고, 터널 붕괴에 대한 최종 책임도 확정되지 않았다.

복잡한 지질조건과 설계변경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책임을 중국 시공사에 귀속시키기는 어렵다. 그러나 준공 후 핵심 구조물에 문제가 생겼고, 원래 시공사를 다시 불러야 했으며, 발전소가 생산하지 못한 전력의 가치가 국가와 소비자에게 전가됐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닐룸–젤룸 발전소 일자별 경과


닐룸–젤룸 발전소 금액별 정리



출처: Neelum Jhelum Hydropower Company – 공식 프로젝트 이력
Energy Update – 터널 붕괴 손실 및 복구계약
Dawn – Neelum-Jhelum project ‘a failure of planning, execution’
Profit by Pakistan Today – 2026년 추가 감사 결과


젤룸 수력발전소



2-6. 에콰도르 코카 코도 싱클레어: 계약과 보증이 강하면 청구서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


중국 Sinohydro가 건설한 에콰도르의 1,500MW 코카 코도 싱클레어 수력발전소에서는 준공 전부터 구조물 균열과 계약 위반 문제가 제기됐다.

에콰도르 감사원은 분배관 구조물에서 7,648개의 균열을 확인했으며, 계약 위반과 구조적 결함으로 인한 국가 손실을 1억6,500만 달러로 산정했다. Sinohydro에 부과해야 할 8,000만 달러의 벌금이 징수되지 않았다는 지적도 나왔다.

그러나 이 사례의 결론은 발주국에 대한 일방적인 비용 전가가 아니었다. 2026년 국제중재 합의에 따라 에콰도르는 현금과 재생에너지 투자를 합쳐 4억 달러의 보상을 받게 됐다. 운영·유지보수와 운영위험도 PowerChina가 부담하는 방향으로 조정됐다.

이는 중요한 반례다. 중국 기업이 참여한 모든 프로젝트가 발주국의 일방적 손실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독립적인 감리, 장기간 유지되는 성능보증, 집행 가능한 이행보증금과 국제중재 조항을 확보하면 하자와 운영위험을 시공사에 되돌릴 수 있다.

코카 코도 싱클레어 발전소 일자별 경과



코카 코도 싱클레어 발전소 금액별 정리


출처: 에콰도르 감사원 – Sinohydro 관련 감사 결과
에콰도르 감사원 자료 – 사업비와 계약 구조
CELEC – 국제중재 합의 및 운영위험 이전

Ecuador: State files arbitration claim against Sinohydro over cracks in Coca Codo Sinclair hydroelectric dam, which caused significant environmental damage


3. 노스볼트에서 확인된 것은 ‘사보타주’가 아니라 ‘기술 의존’이다


유럽 배터리업체 노스볼트의 파산 원인을 설명하는 법원 문서에 중국 장비업체 엔지니어들의 고의적인 방해가 적시됐다는 주장이 유통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 확인할 수 있는 미국 파산법원 제출자료와 스웨덴 파산관재인 관련 보도에서는 고의적 사보타주가 파산 원인으로 공식 인정됐다는 근거를 찾기 어렵다.

확인되는 사실은 노스볼트가 코로나19 기간에 중국산 생산장비를 완전한 공장인수시험(FAT) 없이 받아들였고, 이후 중국 Wuxi Lead 소속 기술자 수백 명이 현장에서 설치·보정·소프트웨어 설정과 직원교육을 담당했다는 것이다.

파산관재인 보고서를 인용한 보도는 노스볼트 내부에도 배터리 양산 경험이 부족해 중국 공급업체 의존도가 커졌다고 지적한다. 중국 업체에 대한 미지급 송장도 약 5억 스웨덴크로나에 달했다.

따라서 노스볼트에서 얻어야 할 교훈은 확인되지 않은 고의적 방해가 아니다. 핵심 공정의 설치·보정·소프트웨어 설정을 공급업체 기술자에게 맡긴 상태에서 내부 엔지니어링 역량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면, 공장을 소유하고도 생산라인을 독립적으로 통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노스볼트 중국 장비 의존 일자별 경과


노스볼트 금액별 정리



출처: Evertiq – Northvolt의 중국 장비업체 의존과 미완료 FAT
참고: Northvolt – 2025년 3월 스웨덴 파산 발표문, PDF

Northvolt Bankruptcy


4. 미국이 차단하려는 것은 장비가 아니라 외국의 잔존 권한이다


2026년 8월 26일 백악관이 공개한 전력망 안보 행정명령은 외국산 장비에 디지털 백도어가 내장되거나 외국 정부가 원격으로 접근할 가능성을 직접 언급한다. 국제분쟁이나 무역 중단으로 부품과 유지보수 서비스가 끊기는 상황도 국가안보 위험으로 규정한다.

적용 범위는 69kV 이상 송전망을 중심으로 하며 변압기, 발전기, 터빈, 고압차단기, 계통연계 인버터, BESS, UPS, 보호계전기, PLC·RTU·IED, 분산제어시스템과 안전계장시스템을 포함한다.

특히 장비 본체에 한정되지 않는다. 핵심 부품·소프트웨어·펌웨어·디지털 서비스·유지보수 서비스·원격접속 기능·생애주기 업데이트 체계까지 심사 대상이다.

다만 이번 조치를 모든 외국산 전력 장비의 일률적 금지라고 표현하면 범위가 과장된다. 금지 대상이 되려면 대상 외국 주체와 관련된 장비·서비스이면서 에너지부가 사보타주, 무단접속, 공급망 중단 또는 국가안보상 수용할 수 없는 위험을 초래한다고 판단해야 한다.

‘대상 외국 주체’에는 ITAR §126.1에 따른 미국의 무기금수·제재 대상국이 포함된다. 이 조항에는 중국이 명시돼 있기 때문에 중국 정부의 관할이나 통제를 받는 장비업체는 실질적인 핵심 심사 대상이 된다.

가장 강력한 부분은 기설치 장비다. 물리적으로 정상 작동하는 장비라도 공급업체·펌웨어·원격접속 위험이 확인되면 격리하거나 교체할 수 있다. 안보 분류 하나로 기존 전력자산이 조기 퇴출되는 규제적 좌초자산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미국 전력망 안보 행정명령 일자별 이행계획


행정명령의 수치·적용범위 정리


출처: 백악관 – 미국 대규모 전력망 안보 국가비상사태 행정명령
백악관 Fact Sheet
미국 전자연방규정집 – 22 CFR §126.1


5. AI 시대에는 전력망의 작은 취약점이 거대한 손실로 확대된다


과거에는 발전소 한 곳의 고장이 지역 정전과 전력회사의 손실로 끝날 수 있었다. 그러나 AI 데이터센터와 첨단 반도체 공장, 방산시설이 전력망에 연결되면서 전력중단의 피해 규모가 완전히 달라지고 있다.

수십억 달러가 투입된 AI 데이터센터는 전력품질 저하나 짧은 계통 장애에도 연산작업이 중단될 수 있다. 반도체 생산라인 역시 순간정전만으로 재공정과 웨이퍼 폐기 손실이 발생한다. 발전·송전 장비의 신뢰성은 이제 전기요금의 문제가 아니라 AI 경쟁력·첨단 제조능력·국방 생산능력의 문제가 됐다.

미국의 판단은 명확하다. 중국산 장비의 초기 구매가격이 낮더라도 장비 안에 확인하기 어려운 펌웨어가 존재하고, 원격 유지보수 권한이 외국 공급업체에 남으며, 부품 공급까지 특정 국가에 집중돼 있다면 그 장비는 충분히 싸지 않다.

앞으로 전력 장비를 구매할 때는 가격과 효율뿐 아니라 공급업체의 소유구조, 소프트웨어 출처, 원격접속 권한, 부품 재고, 유지보수 인력과 지정학적 단절 가능성까지 함께 평가해야 한다.

이는 전력장비 시장의 경쟁 기준이 단순한 제조원가에서 검증 가능한 공급망·사이버 보안·장기 서비스 독립성으로 이동한다는 의미다. 북미 현지 생산기반을 갖춘 변압기·스위치기어·계통자동화·BESS·산업제어 보안업체에는 구조적인 교체수요가 발생할 수 있다.

반대로 중국산 핵심 부품을 제3국에서 단순 조립하거나, 중국 본사의 펌웨어와 원격 유지보수 체계에 의존하는 업체는 미국 현지 생산을 표방하더라도 최종 시행규칙의 심사를 피하기 어려울 수 있다.


6. ‘중국 기업은 모두 부실하다’는 주장도 경계해야 한다


개별 사례만으로 모든 중국 시공업체가 다른 국가의 기업보다 품질이 낮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다. 국제개발센터(CGD)가 2000~2023년 세계은행 지원사업 2,687건을 분석한 연구에서는 중국 업체의 계약금액 비중과 전체 사업 성과 사이에 통계적으로 유의한 부정적 관계가 발견되지 않았다.

출처: CGD – Chinese Contractors and Development Project Quality, PDF

그러나 국가기간시설의 조달은 평균적인 품질만으로 결정할 수 없다. 발전소나 송전망에서는 낮은 확률의 사고라도 피해가 국가 전체로 확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책당국이 관리해야 하는 것은 평균 고장률이 아니라 파국적 Tail-Risk이다. 공급국과 외교관계가 악화되거나 원격 지원과 핵심 부품이 중단됐을 때 자체적으로 설비를 운영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한 질문이다.

중국 기업이 건설한 수많은 발전소가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는 사실과, 핵심 전력망에서 중국 공급망 의존을 제한해야 한다는 판단은 동시에 성립할 수 있다.


7. 앞으로 인프라 계약에서 반드시 확보해야 할 것


중국 기업과의 EPC 계약 자체를 금지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법은 아니다. 다만 초기 건설가격을 평가하기 전에 발주국은 최소한 다음 조건을 계약으로 확보해야 한다.

  • 출하 전 독립기관이 참여하는 공장인수시험(FAT)과 현장인수시험(SAT)

  • 소프트웨어 구성명세서와 펌웨어 검증권, 원격접속 기록 및 발주자 차단권

  • 핵심 예비부품의 현지 의무비축과 복수 공급원

  • 현지 기술자가 외국 인력 없이 운전·정비할 수 있을 때까지의 인수 유예

  • 출력·가동률·열효율에 연동된 장기 성능보증과 지체상금

  • 하자보증금과 모회사 지급보증, 국제중재 판정의 집행 가능성

  • 시공업체와 독립된 발주자 기술자문 및 설계검증 기관

  • 계약 종료 후에도 사용할 수 있는 소스코드·매뉴얼·설계도면의 에스크로


이 조건이 없다면 턴키 계약은 발전소를 완성된 상태로 넘겨받는 계약이 아니라, 시공업체에 장기간 운영을 의존하는 계약이 될 수 있다.


CONCLUSION


우간다 카루마댐의 4,000만 달러 추가 제안, 보츠와나 모루풀레 B의 243억 풀라 추가 직·간접비용, 스리랑카 락비자야의 6,700만 달러 O&M 계약, 파키스탄 닐룸–젤룸의 991억8,000만 루피 영업중단 손실은 서로 다른 국가에서 발생한 개별 사건이다.

모든 책임이 시공사에 있다고 단정할 수 없고 모든 중국산 설비가 위험하다는 증거도 아니다. 그러나 이 사례들은 핵심 인프라의 진짜 비용이 준공 시점의 EPC 가격이 아니라, 설비가 고장 난 뒤 외국 기술자와 부품, 소프트웨어 지원 없이도 계속 운영할 수 있는가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미국의 새로운 전력망 행정명령은 조달 기준을 최저가격에서 운영주권을 포함한 생애주기 위험으로 이동시킨다. 신규 장비만이 아니라 이미 설치된 장비, 소프트웨어, 펌웨어, 유지보수 서비스와 원격접속 권한까지 규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력망 장비를 구매한다는 것은 변압기나 터빈 한 대를 사는 일이 아니다. 향후 수십 년 동안 누가 그 장비를 진단하고, 수리하고, 업데이트하며, 필요할 때 외부 연결을 끊을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일이다.

인프라의 진짜 가격은 얼마에 지었는가가 아니라, 공급업체의 허락 없이도 멈추지 않을 수 있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전체 사례 종합 비교


아래 금액은 초기 EPC 사업비, 추가 보수 제안액, O&M 계약, 전력 수입비, 영업중단 손실 및 중재보상 등 성격이 서로 다른 수치다. 따라서 단순 합산보다는 각 프로젝트에서 초기 건설비 외에 어떤 형태의 두 번째 청구서가 발생했는지를 비교하는 용도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글을 마치며


몇 달 전 신차를 구입할 무렵,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BYD의 신형 전기차 광고를 자주 봤다. 가격은 저렴하면서도 주행성능과 편의사양은 기존 완성차에 뒤지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중국산 전기차는 유럽으로 빠르게 수출되며 전통 완성차업체의 시장점유율을 잠식하고 있었다. 국내 자동차 전문 유튜브에서도 중국 전기차의 성능과 가격경쟁력을 높게 평가하는 영상을 여러 차례 접하다 보니, 나 역시 잠시 BYD 차량을 사볼까 고민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기아차를 선택했다. (중국 불신)

최근에는 BYD 차량을 구입한 일부 국내 소비자들이 예상보다 높은 수리비와 부품비, 유지보수 비용을 부담했다는 경험담이 여러 커뮤니티를 통해 공유되고 있다.

https://www.threads.com/@jooni_moorook_oppa/post/DcVvaRSCRpz/media

https://www.threads.com/@jooni_moorook_oppa/post/DcVvaRSCRpz/media

https://www.threads.com/@jooni_moorook_oppa/post/DcVvaRSCRpz/media


그외 여러 사례 모음

https://arca.live/b/vehicle/173962379


개별 사례만으로 중국 기업이 의도적으로 유지보수 비용을 과잉 청구한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앞서 살펴본 발전소와 수력발전소 사례가 겹쳐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처음에는 낮은 가격과 빠른 공급능력을 앞세우지만, 제품이나 시설을 도입한 이후에는 부품·소프트웨어·전문인력과 유지보수 체계가 원래 공급업체에 종속되면서 예상하지 못했던 두 번째 청구서가 발생하는 구조다. 개인이 구매하는 자동차에서도 이러한 문제가 우려된다면, 수십 년간 국가경제와 국민의 일상을 떠받쳐야 하는 발전소와 송전망에서는 그 위험을 훨씬 엄격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특히 AI 데이터센터와 첨단 제조업의 확대로 전력망의 중요성이 갈수록 커지는 상황에서, 중국 공급망의 신뢰도는 단순한 가격이나 제품 성능만으로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고장이 발생했을 때 합리적인 비용으로 수리할 수 있는지, 외국 기술자 없이 독립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지, 공급업체가 지원을 중단하더라도 핵심 부품과 소프트웨어를 확보할 수 있는지까지 함께 살펴야 한다.

결국 자동차든 발전소든 구매 당시 얼마나 저렴했는가보다, 문제가 생긴 이후에도 공급업체에 끌려다니지 않고 합리적인 비용으로 계속 사용할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 개인의 자동차 선택에서도 고민되는 문제라면, 국가의 전력과 사회기반시설을 중국 기업에 맡길 때는 그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경계와 검증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중국산 장비들로 라인을 쫙 깔아놓은 이차전지 국내 배터리 업체들은 라인이 문제 없이 잘 돌아가는지..)

=끝

2026년 8월 25일 화요일

생각정리 352 (* 분권형 대통령제, 이원집정부제)

요즘은 시간을 들여 읽을 만한 리포트나 블로그 글을 찾는 일조차 쉽지 않은 것 같다.

양질의 글을 찾기 어려워 결국 나중에 다시 읽고 싶은 내용을 직접 멋대로 정리해 생각도 정리할겸 블로그에 남기고는 있지만, 이 일을 언제까지 계속하게 될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한국인 방문자가 15%밖에 없는 한국어 블로그라..


아무튼, 오늘 오랫만에 국내 정치 관련된 글을 정리 기록해본다.

2027년 서울시장 재선거에서 2028년 개헌까지


공개된 자료로 읽는 권력구조 개편과 서울 자산시장 시나리오


전체 흐름을 먼저 압축하면 다음과 같다.


2027년 서울시장 재선거 가능성 → 서울·청년층 민심 회복을 위한 경제·부동산 정책 강화 → 2027년 개헌안 마련 → 2028년 총선과 개헌 국민투표 동시 실시 → 대통령 권한 분산과 4년제 대통령제 도입 → 2030년 이후 선거주기 재편

이 가운데 상당 부분은 확인되지 않은 풍문이 아니라 이미 공약, 국정과제, 국회 발의, 국회의장 발언을 통해 공개된 내용이다.

다만 최종 권력구조가 프랑스식 이원집정부제로 확정됐다는 근거는 아직 없다. 현재 확인되는 것은 대통령제를 유지하면서 대통령 권한 일부를 국회와 국무총리에게 넘기는 분권형 대통령제다.

2027년 서울시장 재선거와 자산시장 부양의 연결도 공식적으로 확인된 정책 목적은 아니다. 하지만 정치 일정과 최근 부동산·금융정책의 방향을 함께 보면, 서울 민심 회복을 위해 정부가 재정과 금융지원을 확대할 가능성은 충분히 검토할 만하다.


1. 개헌은 갑자기 등장한 의제가 아니다


이재명 대통령의 분권형 개헌 구상은 최근 국민의힘 의원들과의 골프 회동에서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다.

민들레가 정리한 과거 발언을 보면 이 대통령은 2017년 민주당 대선 경선 때부터 대통령제를 유지하되 중앙정부 기관 사이의 권한을 나누는 분권형 대통령제와 4년 중임제를 주장했다.

2022년 대선에서는 대통령선거·국회의원선거·지방선거가 서로 엇갈리는 일정을 조정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대통령 임기를 1년 줄이는 방안도 검토할 수 있다고 밝혔다. 민들레의 개헌 발언 정리

보다 구체적인 개헌안은 2025년 5월 18일 공개됐다.

당시 이재명 대통령 후보가 제안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대통령 4년 연임제

  • 대통령 결선투표제

  • 국무총리 국회 추천제

  • 감사원의 국회 소속 이관

  • 대통령 재의요구권 제한

  • 비상명령과 계엄 선포에 대한 국회 통제 강화

  • 수사기관장과 중립기관장 임명 시 국회 동의 의무화

  • 5·18 민주화운동 정신의 헌법 전문 수록

핵심은 대통령 임기만 5년에서 4년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었다. 대통령의 권한을 국회와 국무총리 쪽으로 분산하고, 국회의 대통령 견제권을 강화하는 내용이 동시에 들어 있었다.

개헌 국민투표 시점도 이미 제시됐다. 논의가 빠르면 2026년 지방선거, 늦어도 2028년 국회의원 총선거와 동시에 국민투표를 실시한다는 구상이었다. 2025년 개헌 구상


2. 대선 공약은 정부 국정과제 1호로 전환됐다


이 개헌 구상은 대선 과정의 정치적 발언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재명 정부는 2025년 9월 개헌을 123대 국정과제 가운데 첫 번째 과제인 ‘진짜 대한민국을 위한 헌법 개정’으로 확정했다.

국정과제에는 다음 내용이 포함됐다.

  • 4년 연임제와 대통령 결선투표제

  • 국무총리 국회 추천제

  • 감사원 국회 이관

  • 대통령 거부권 제한

  • 비상명령과 계엄에 대한 국회 통제 강화

  • 중립성이 필요한 기관장 임명 시 국회 동의 의무화

  • 국회 개헌특별위원회 구성 요청

  • 2026년 지방선거 또는 2028년 총선 동시 국민투표

이재명 정부 국정과제 1호 개헌

따라서 2028년 개헌 국민투표는 비공개 정치 시나리오가 아니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제시한 국정운영 일정이다.

다만 2028년 국민투표를 실시하려면 그보다 앞서 구체적인 개헌 조문을 만들고 여야 합의를 끌어내야 한다. 이 작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될 시점이 2027년이다.


3. 2026년 첫 번째 개헌 시도에서 확인된 것


2026년 4월 3일 민주당·조국혁신당·진보당·개혁신당·기본소득당·사회민주당 소속 의원 등 187명은 실제로 헌법개정안을 발의했다.

당시 개헌안은 권력구조 전면 개편보다 사회적 합의 가능성이 높은 내용으로 범위를 좁혔다.

  • 헌법 전문에 부마민주항쟁과 5·18 민주화운동 정신 수록

  • 대통령의 계엄 선포에 대한 국회 통제 강화

  • 지역균형발전 의무 명문화

  • 헌법 제명의 한글 표기

발의 당시 국회 재적 의원은 295명이었다. 개헌안 통과에는 재적 의원 3분의 2인 197명의 찬성이 필요했다. 발의 의원 187명이 모두 찬성하더라도 추가로 10명의 찬성표가 필요했다. 2026년 개헌안 발의

그러나 5월 7일 본회의 표결에는 국민의힘 의원들이 참여하지 않았다. 재적 의원 변동으로 당시 의결정족수는 191명이었지만 실제 투표에 참여한 의원은 178명에 그쳤다.

결국 2026년 지방선거와 동시에 실시하려던 개헌 국민투표는 무산됐다. 개헌안 표결 무산

이 과정에서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해졌다.

민주당과 군소정당이 결집하더라도 국민의힘 일부의 협조 없이는 개헌이 불가능하다.

국회 의석이 300석이라면 개헌안 통과에 필요한 숫자는 200석이다. 이는 단순한 과반 입법과 전혀 다른 수준의 합의를 요구한다.


4. 조정식 국회의장과 2027~2028년 개헌 일정


2026년 6월 5일 조정식 의원이 제22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으로 선출됐다.

조 의장은 민주당 정책위의장과 사무총장을 지냈고, 이재명 대통령의 정무특별보좌관을 맡은 경력이 있다. 국회의장 임기는 22대 국회가 끝나는 2028년 5월 29일까지다. 조정식 국회의장 선출

조 의장은 7월 17일 제헌절 경축사에서 구체적인 개헌 일정을 제안했다.

  • 의장 직속 헌법개정자문위원회 출범

  • 개헌 로드맵과 의제 정리

  • 2027년 본격적인 국민 공론화

  • 2027년 ‘국민주권 개헌안’ 마련

  • 22대 국회 임기가 끝나는 2028년 5월 이전 개헌 완료

권력구조 개편 역시 공식 논의 대상으로 제시됐다. 조정식 의장의 개헌 로드맵

국회의장은 대통령이 임명하는 자리가 아니며 본회의 투표로 선출된다. 따라서 조정식 의장 선출을 대통령의 개헌 지시로 해석할 근거는 없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정부의 국정과제와 조 의장의 개헌 일정이 정확히 맞물린다.

정부는 2028년 총선 동시 국민투표를 목표로 하고, 국회의장은 2027년 개헌안 마련과 2028년 5월 이전 완료를 제안했다.

이는 개헌 논의가 공약과 정부 계획을 넘어 국회 차원의 실행 단계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5. 김태호 의원과의 골프 회동이 보여준 것


2026년 6~7월 이재명 대통령이 여야 인사들과 골프 회동을 가진 사실도 공개됐다.

민들레 기사와 김태호 국민의힘 의원의 설명을 종합하면, 6월 전·현직 국회의장단과의 회동에서는 개헌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다. 개헌 논의가 있었던 것은 7월 4일 김태호 의원 등이 참석한 회동이었다.

김태호 의원은 자신이 먼저 87년 체제 개편과 권력분산 필요성을 제기했고, 이 대통령이 이에 공감했다고 설명했다.

김 의원에 따르면 이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자신의 임기를 단축해서라도 개헌이 필요하다는 취지로 발언했다. 다만 구체적인 개헌안이나 표결 협상이 논의됐다고 볼 만한 자료는 공개되지 않았다. 김태호 의원이 전한 개헌 대화

이 회동의 의미를 과장할 필요는 없다. 김 의원이 먼저 개헌 문제를 제기했고 대통령이 자신의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다는 것이 현재까지 확인된 사실이다.

그럼에도 다음과 같은 시간적 흐름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26년 5월 개헌안 무산 → 6월 조정식 국회의장 선출 → 6~7월 여야 인사들과의 대화 → 7월 조정식 의장의 2027~2028년 개헌 일정 발표

2026년 첫 개헌 시도에서 야당 협조의 필요성이 확인된 이후, 대통령과 국회가 모두 여야 합의를 강조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6. 개헌이 실제로 통과되려면


헌법 개정은 일반 법률을 만드는 입법 절차와 다르다.

현행 헌법 제128~130조에 따르면 개헌은 다음 순서로 진행된다.

  1. 대통령 또는 국회 재적 의원 과반수가 개헌안을 발의한다.

  2. 대통령이 개헌안을 20일 이상 공고한다.

  3. 국회가 공고일부터 60일 이내에 표결한다.

  4. 재적 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 한다.

  5. 국회 통과 후 30일 이내 국민투표를 실시한다.

  6. 전체 선거권자 과반수가 투표하고 투표자 과반수가 찬성해야 확정된다.

대한민국헌법 제128~130조

국회 개헌특별위원회는 헌법상 필수 절차는 아니다. 하지만 개헌 의제를 정리하고 조문을 작성하며 여야 합의를 만드는 정치적 기구로서 사실상 필요하다.

결국 2027년 개헌 논의의 핵심은 세 가지다.

  • 민주당과 군소정당이 공통 개헌안을 만들 수 있는가

  • 국민의힘이 공식 협상에 참여하는가

  • 국회 재적 의원 3분의 2를 확보할 수 있는가

2026년 표결을 통해 개헌의 최대 장애물이 국민투표가 아니라 국회 의결정족수라는 사실이 이미 확인됐다.


7. 최종 권력구조는 프랑스식 이원집정부제인가


현재 공식적으로 확인되는 방향은 국회의 권한이 강화된 4년제 대통령제다.


청와대 역시 내각제나 특정한 형태의 이원집정부제를 추진하는 것은 아니며, 기본 방향은 ‘국회 권한이 강화된 4년 중임 대통령제’라고 설명했다. 청와대의 권력구조 개헌 설명

프랑스식 이원집정부제가 성립하려면 총리와 정부가 국회에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한다. 국회의 불신임으로 내각이 물러날 수 있어야 하고 대통령과 총리의 정책권한도 구체적으로 나눠야 한다.

프랑스 헌법은 정부가 국가정책을 결정하고 수행하며 의회에 책임을 지도록 규정한다. 단순한 국회 추천 총리제보다 훨씬 강한 의회책임 구조다.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

따라서 현 단계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현재 공개된 개헌 방향은 프랑스식 이원집정부제가 아니라 대통령제를 유지하면서 국회와 총리의 권한을 강화하는 분권형 대통령제다. 다만 2027년 개헌안에 총리의 독자적인 내정권과 국회에 대한 정치적 책임이 추가된다면 실제 운영은 이원집정부제에 가까워질 수 있다.

결국 명칭보다 중요한 것은 2027년에 작성될 실제 헌법 조문이다.


8. 2027년 서울시장 재선거가 중요한 이유


오세훈 서울시장은 2026년 7월 정치자금법 위반 사건 1심에서 벌금 1,000만 원을 선고받았다.

최종심에서 공직 상실형이 확정돼 2027년 2월까지 시장직을 잃으면 4월 7일 재선거가 실시될 수 있다. 확정 시점이 3~8월이면 재선거는 10월 6일로 넘어갈 수 있다.

아직 최종 판결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서울시장 재선거가 법적으로 확정된 것은 아니다. 서울시장 재선거 가능 일정

그럼에도 민주당은 이미 재선거를 현실적인 정치 일정으로 준비하고 있다.

김민석 민주당 대표는 “내년 서울시장 선거가 거의 정해져 있다”며 선거 결과에 대표직 재신임을 걸겠다고 밝혔다. 서울시장 선거 승리를 2028년 총선 수도권 승리의 전초전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민주당의 서울시장 선거 인식

서울시장 재선거는 개헌의 법적 절차와 직접 연결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전 중요한 시험대가 될 수 있다.

  • 정부와 민주당의 서울 지지율 회복 여부

  • 2028년 총선 수도권 판세 점검

  • 범여권 정당 사이의 선거연대 가능성

  • 개헌 추진에 필요한 정치적 동력 확보

  • 서울 부동산과 청년 주거정책에 대한 평가

따라서 재선거가 현실화한다면 2027년 서울시장 선거는 2028년 총선과 개헌 국민투표를 앞둔 첫 번째 정치적 관문이 될 가능성이 높다.


9. 서울시장 선거와 부동산 정책의 방향 전환


정부가 서울시장 선거 승리를 위해 부동산 가격을 끌어올리기로 결정했다는 공식 자료는 없다. 정책의 정치적 목적을 그렇게 단정해서는 안 된다.

다만 정부 정책이 정비사업 억제보다 공급 촉진과 금융지원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확인된다.

정부가 2026년 8월 13일 발표한 부동산 대책에는 다음 내용이 포함됐다.

  • 수도권 23만 호 이상 추가 공급

  • 2027~2028년 조기 착공 사업에 세제·금융·규제 인센티브

  • 재개발 조합 설립 동의율 완화

  • 정비사업 이주비 대출 LTV 산정방식 개선

  • 부동산 PF 보증과 자금지원을 26조3,000억 원에서 47조8,000억 원 이상으로 확대

  • 가계부채 증가율 관리 목표를 1.5%에서 3% 수준으로 상향

  • 민간 주택사업자에 대한 금융·세제 지원 확대

금융위원회·국토교통부 부동산 금융대책

정부는 동시에 투기적 대출 수요를 계속 관리하겠다고 밝혔다. 따라서 이를 전면적인 주택담보대출 규제 해제로 해석할 수는 없다.

그러나 PF 지원과 이주비 금융 완화, 조기 착공 인센티브는 서울 핵심 정비사업의 사업성과 자금조달 여건을 직접 개선한다.

부동산 가격은 완공된 주택 공급보다 다음과 같은 변화를 먼저 반영한다.

규제 완화 기대 → 사업성 개선 → 조합원 부담 감소 → 금융조달 정상화 → 사업 속도 상승 → 토지와 기존 주택 가치 재평가

따라서 정책의 명목상 목적이 공급 확대라고 하더라도, 착공까지 시간이 필요한 서울 도심에서는 단기적으로 공급 효과보다 자산가격 기대가 먼저 움직일 가능성이 있다.


10. 2027년부터 서울 도심 가격이 다시 상승할 가능성


2027년 서울 부동산시장을 바라볼 때 핵심은 서울 전체가 동시에 오르는지가 아니다. 정부 지원과 규제 완화의 혜택이 집중되는 지역이 어디인지가 중요하다.

우선 반응할 가능성이 높은 곳은 다음과 같다.

  • 재건축·재개발 사업성이 규제와 금융비용에 민감한 지역

  • 이주비 대출과 PF 지원의 효과가 큰 대규모 정비사업

  • 용적률 상향과 기부채납 완화 가능성이 있는 사업지

  • 토지가 희소하고 신규 공급이 제한된 서울 핵심 업무지구

  • 교통·업무·상업 기능이 결합된 용산·여의도·강남권

  • 목동·압구정·대치 등 대규모 재건축 추진 지역

서울시장 선거가 실시된다는 전제 아래 정부와 민주당은 서울 유권자에게 정책 성과를 보여줘야 한다.

주택 가격을 직접 올리는 것이 공식 목표가 될 수는 없지만, 공급 확대를 명분으로 정비사업 금융과 민간 개발을 지원하면 결과적으로 사업지의 토지와 기존 주택 가치가 먼저 상승할 수 있다.

따라서 2027년은 서울 도심 부동산시장이 규제 중심 국면에서 사업성·금융지원 중심 국면으로 전환되는 시기가 될 가능성이 있다.


https://t.me/jump0000 
해당 텔레그램 개인채널 과거 실선 그래프에서 개인적인 *점선 전망치를 덧붙임



11. 2028년 개헌 이후 예상되는 선거주기


2028년 총선과 동시에 개헌 국민투표가 실시되고 4년제 대통령제가 통과되더라도, 선거 일정이 자동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대통령 임기와 차기 선거 일정을 조정하는 경과조항이 개헌안에 포함돼야 한다.

가능한 구조는 다음과 같다.


이 구조가 만들어지면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선거가 2년 간격으로 교차한다. 미국의 대통령선거와 중간선거처럼 국민이 2년마다 정부와 의회를 평가하는 정치체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 대통령이 2022년부터 대선·총선·지방선거 주기를 조정하기 위해 대통령 임기 단축도 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혔다는 점에서 선거주기 재편 구상은 과거 발언과 연결된다.

다만 2030년 대통령선거와 지방선거의 동시 실시가 확정된 것은 아니다. 실제 일정은 2027년에 마련될 개헌안과 경과조항을 확인해야 판단할 수 있다.


결론: 개헌은 공개된 계획이고, 자산시장 부양은 그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정치·경제적 결과다


공개된 자료만으로 확인되는 결론은 비교적 분명하다.

첫째, 이재명 정부는 대통령 4년제와 권한 분산을 포함한 개헌을 국정과제 1호로 추진하고 있다.

둘째, 2026년 첫 개헌 시도를 통해 국민의힘 일부의 협조 없이는 국회 통과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셋째, 조정식 국회의장은 2027년 개헌안 마련, 2028년 5월 이전 개헌 완료라는 시간표를 공개했다.

넷째, 현재 공식적으로 제시된 제도는 프랑스식 이원집정부제가 아니라 국회와 총리의 권한을 강화한 분권형 대통령제다. 최종 형태는 2027년 실제 개헌 조문을 확인해야 한다.

다섯째, 2027년 서울시장 재선거가 현실화하면 이 선거는 2028년 총선과 개헌 국민투표로 넘어가기 전 가장 중요한 정치적 시험대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 과정에서 서울 민심과 청년층 지지율을 회복하기 위한 주택 공급, 정비사업 규제 완화, 이주비·PF 금융지원이 확대될 수 있다. 정책의 공식 목적은 공급 정상화지만, 서울 도심에서는 실제 공급보다 사업성 개선에 대한 기대가 먼저 가격에 반영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전체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서울시장 재선거 가능성 → 서울 민심 회복 정책 → 정비사업·금융지원 확대 → 핵심 도심 자산가격 재평가 → 2028년 총선과 개헌 국민투표 → 대통령 권한 분산과 4년제 도입 → 2030년 이후 선거주기 재편

결국 2027년은 단순히 서울시장 한 명을 다시 뽑는 해가 아니라, 부동산 정책과 권력구조 개편이 동시에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정치적 전환점이 될 가능성이 있다.

서울 핵심 지역의 부동산 가격 역시 이러한 정책과 정치 일정의 영향을 받아 다시 상승 압력을 받을 가능성을 열어둘 필요가 있다. 다만 이는 재선거 실시, 개헌 추진, 금융지원 확대가 실제로 이어진다는 전제에 기반한 시나리오이며 확정된 가격 전망은 아니다.

#글을 마치며


지난해부터 정치권에서 내각제 이야기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기에 또 어떤 형태로 되살아날지 개인적으로 궁금해하긴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원집정부제’나 ‘분권형 대통령제’라는 새로운 이름을 달고 다시 등장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예전에 아는 동생과 저녁을 먹으며 내각제에 관해 이야기했던 기억이 문득 떠오른다. 당시 동생은 내게 이렇게 되물었다.

“형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국개(국회)의원을 정말 신뢰한다고 생각해요? 대선 공약과 정반대로 움직이는 대통령조차 믿기 어려운 상황인데, 국개의원을 믿고 더 많은 권한을 넘기는 내각제 개헌에 국민들이 찬성할까요?”

그 질문을 듣기 전까지는 나 역시 그 지점까지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대통령에 대한 불신이 곧바로 국회에 대한 신뢰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국회에 더 많은 권한을 넘기는 개헌이 국민투표를 통과하려면, 권력 분산의 필요성보다 먼저 국개의원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부터 넘어야 했다.

그 현실적인 장벽을 생각하면, 명칭을 내각제에서 분권형 대통령제나 이원집정부제로 바꾼다 해도 국민의 동의를 얻는 일이 그리 쉬워 보이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끝

생각정리 351 (* Europe’s Structural Decline)

 Europe은 왜 저럴까 하는 생각이 자주 들게끔하는 최근 생각을 정리해본다.

유럽의 성장 엔진은 왜 멈췄는가


고령화·인재 유출·재정 분열·에너지 문제가 AI 시대 유럽의 상대적 후퇴를 가속하는 방식


이전 글에서 앞으로의 세계를 Public Debt는 사회 전체가 부담하지만, AI가 만들어내는 성장의 과실은 일부 국가와 기업에 집중되는 시대라고 정리했다.

그렇다면 이 구조에 가장 취약한 지역은 어디일까.

현재로서는 유럽, 그중에서도 독일·프랑스·이탈리아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세 나라는 서로 다른 경제구조를 갖고 있지만 공통적으로 낮은 성장률과 고령화, 높은 사회지출, 정치적 분열에 직면해 있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미래에 투자해야 할 시점에 연금·의료·국방·에너지 보조금과 이자비용까지 동시에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 유럽은 낮은 성장률로도 비교적 안정적인 사회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막대한 전력·컴퓨트·자본과 고급인재를 선제적으로 투입해야 하는 AI 경쟁에서는 느린 성장과 느린 의사결정 자체가 누적적인 경쟁력 상실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국가별 생산성과 재정상태가 크게 다른 경제를 하나의 통화로 묶은 유로화의 구조적 긴장도 다시 커지고 있다.

유로는 국가별 환율 차이를 없앴지만, 각국의 인구구조·산업경쟁력·재정규율·정치문화를 하나로 만들지는 못했다.


1. 문제는 낮은 성장률이 아니라 성장 엔진의 고장이다


2026년 봄 유럽위원회 전망을 보면 독일·프랑스·이탈리아의 향후 성장률은 모두 1% 안팎에 머문다.

참고자료: European Commission–Germany, France, Italy, 21 May 2026.

세 나라가 처한 상황은 같지 않다.

독일은 아직 부채비율이 상대적으로 낮지만 제조업과 수출이라는 성장 엔진이 약해지고 있다. 프랑스는 상대적으로 우수한 전력 기반을 갖고 있지만 재정적자와 정치적 교착이 심각하다. 이탈리아는 이미 높은 부채를 안고 있는 상태에서 생산성과 인구가 함께 정체돼 있다.

따라서 유럽의 문제를 단순히 정부부채가 많거나 복지가 지나치다는 문장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더 정확한 문제는 기존 사회모델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비용은 계속 증가하는데, 그 비용을 부담할 새로운 성장산업과 생산성 향상은 충분히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사회지출이 많더라도 생산성과 세수가 빠르게 증가한다면 체제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성장률이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태에서 연금·의료·국방·에너지·이자비용이 동시에 증가하면 미래 투자를 위한 재정공간은 자연스럽게 줄어든다.

Low Growth → Weak Tax Base → Fiscal Pressure → Tax·Contribution Increase → Private Investment Weakness → Lower Productivity

유럽의 저성장은 하나의 결과가 아니라 다음 저성장을 만들어내는 원인으로 바뀌고 있다.


2. 유럽을 지탱했던 세 가지 배당이 동시에 끝났다


전후 유럽경제는 세 가지 구조적 배당을 누렸다.


첫 번째는 생산연령인구가 증가하면서 노동력과 납세자가 함께 늘어난 Demographic Dividend였다. 두 번째는 미국의 안보 우산 아래 국방비를 절감할 수 있었던 Peace Dividend였으며, 세 번째는 러시아의 저렴한 에너지와 중국의 수요를 동시에 이용한 Globalisation Dividend였다.

독일은 러시아산 가스를 제조업의 값싼 투입비용으로 사용하고, 중국에는 자동차·화학·기계류를 수출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도 단일시장과 낮은 금리, 세계화가 제공한 안정적인 환경에서 복지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세 가지 조건이 모두 반대로 움직이고 있다.

Working-age Population ↓ + Defence Spending ↑ + Energy Cost ↑ + China Competition ↑

Mario Draghi는 유럽의 생산가능인구가 2040년까지 매년 약 200만 명씩 감소할 수 있으며, 최근의 생산성 추세가 이어진다면 유럽은 2050년까지 GDP를 현재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동시에 디지털 전환·탈탄소·국방력 확충을 위해 유럽의 투자율을 GDP 대비 약 5%p 높여야 한다고 추정했다. 복지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성장해야 하지만, 성장을 재개하기 위해서는 이전보다 훨씬 많은 선행투자가 필요한 상황이다.

참고자료: The Future of European Competitiveness – Part A, September 2024.

고령화 관련 지출의 절대 수준도 이미 높다. 유럽위원회의 2024 Ageing Report에 따르면 2022년 연금·의료·장기요양·교육을 합한 지출은 독일이 GDP의 24.3%, 프랑스가 29.9%, 이탈리아가 27.3%였다.

특히 공적연금 지출은 프랑스가 GDP의 14.4%, 이탈리아가 15.6%에 달했다. 장기전망에서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총고령화 비용이 반드시 계속 증가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이미 시행된 연금개혁과 급여조건 조정이 유지된다는 전제에 기반한다.

참고자료: European Commission, 2024 Ageing Report.

따라서 중요한 것은 향후 지출의 증가폭만이 아니다.

이미 높은 사회지출을 유지하면서 국방·전력망·AI 인프라라는 새로운 비용까지 동시에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3. 독일·프랑스·이탈리아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약해지고 있다


독일: 제조업 성장모델의 균열


독일의 현재 위기를 노동문화나 노동시간 문제만으로 설명하면 핵심을 놓치게 된다.

독일 제조업 모델은 오랫동안 다음과 같은 구조에 기반했다.

Cheap Russian Gas + Chinese Final Demand + European Supply Chain + US Security

그러나 러시아산 가스의 단절은 화학·철강·유리·비료 등 에너지 집약 산업의 비용구조를 바꿨고, 중국은 독일의 최대 고객에서 자동차·기계·산업장비의 직접 경쟁자로 변했다. 전기차와 소프트웨어 전환에 늦은 자동차산업은 중국 현지 판매와 유럽 내 점유율을 동시에 압박받고 있다.

독일은 코로나 이후 선진국 중 가장 약한 회복세를 보였으며, 2025년에도 성장률이 **0.2%**에 그쳤다. 재정준칙 개혁을 통해 국방과 인프라 투자를 확대하기 시작했지만, 재정적자는 2027년 GDP의 **4.1%**까지 높아질 전망이다.

재정을 확대해도 성장률이 1%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독일의 문제가 단순한 수요 부족보다 산업구조의 변화에 가깝다는 의미다.

더구나 AI 시대의 제조업은 과거보다 더 많은 전력을 필요로 한다. 반도체·배터리·전기차·산업용 AI·데이터센터 모두 안정적이고 저렴한 전력을 요구하지만, 독일은 원전 폐쇄와 러시아 가스 단절 이후 전력가격과 공급 안정성을 동시에 관리해야 한다.

독일이 앞으로 더 많은 부채를 인프라와 국방에 투입하더라도, 그 자본이 값싼 전력·그리드·디지털 인프라와 생산성 향상으로 연결되지 못한다면 결과는 성장회복보다 정부지출 의존도가 높아진 저성장 경제에 가까울 수 있다.


프랑스: 전력은 강하지만 재정과 정치가 약하다


프랑스는 독일·이탈리아와 구분할 필요가 있다.

원전 중심의 전력시스템은 프랑스가 유럽에서 대규모 데이터센터와 AI 인프라를 유치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경쟁력이다. RTE에 따르면 2025년 프랑스 전력의 95% 이상이 저탄소 전원에서 생산됐고, 생산량의 약 20%가 주변 국가로 수출됐다.

2026년 프랑스에는 약 300개의 데이터센터가 존재하며 전력소비량은 약 10TWh로 전체 소비의 2% 수준이다. 그러나 2026년 5월 기준 데이터센터 관련 계통연결 신청은 약 18GW에 달했다.

이는 프랑스가 유럽 AI 인프라의 중심지가 될 잠재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발전량보다 특정 지역의 송전망과 접속용량이 새로운 병목이 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참고자료: RTE, Les data centers en chiffres clés, 2026.

문제는 재정이다.

프랑스의 재정적자는 2026년에도 GDP의 **5.1%**에 머물고, 현행 정책이 유지되면 2027년에는 **5.7%**로 다시 확대될 전망이다. 정부부채는 같은 해 GDP의 120.2%, 이자비용은 2.8%까지 상승할 것으로 예상된다.

연금개혁과 재정긴축은 강한 정치적 저항에 직면하고, 정부가 의회에서 안정적인 지지를 확보하기도 어려워졌다. 프랑스의 문제는 개혁의 필요성을 몰라서가 아니라 누가 현재의 소득과 혜택을 포기할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만들기 어렵다는 데 있다.

프랑스는 유럽 국가 가운데 AI 전력 경쟁에서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으면서도, 이를 장기적인 자국 기업·클라우드·모델 경쟁력으로 전환할 재정과 정치적 실행력이 부족할 가능성이 있다.

프랑스에는 전력이 있지만 그 전력을 사용하는 데이터센터가 미국 클라우드와 모델기업의 유럽 거점에 머문다면, 전력수요는 프랑스에 남아도 AI의 초과이익은 해외로 이전될 수 있다.


이탈리아: 높은 부채보다 더 큰 문제는 낮은 생산성이다


이탈리아는 이미 GDP의 **137%**를 넘는 정부부채를 안고 있다. 그럼에도 2026년과 2027년 성장률은 각각 **0.5%와 0.6%**에 그칠 전망이다.

현재 투자를 지탱하는 중요한 축은 EU Recovery and Resilience Facility다. 그러나 관련 사업이 종료되는 2027년부터 건설과 설비투자의 성장기여도는 약해질 가능성이 높다.

이탈리아는 중소·가족기업 중심의 산업구조가 강하고 자본시장보다 은행대출과 내부자금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이러한 구조는 전통적인 제조업에는 적합했지만, 대규모 무형자산·컴퓨트·소프트웨어·인재 투자가 선행돼야 하는 AI 산업에는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2026년 ECB 연구에서도 유로지역 기업의 약 70%가 어떤 형태로든 AI를 사용한다고 응답했지만, AI를 기업운영에 깊이 통합한 기업은 **7%**에 불과했다. 이탈리아는 조사 대상국 가운데 AI 도입률이 가장 낮은 국가군에 속했다.

참고자료: ECB, Adoption and Investment in AI across the Euro Area, July 2026.

이탈리아의 낮은 실업률 역시 반드시 강한 경제를 의미하지 않는다. 생산연령인구가 감소하면 노동수요가 약해도 실업률은 낮아질 수 있다.

Population ↓ → Firm Scale ↓ → Investment ↓ → Productivity ↓ → Nominal Growth < Interest Cost → Debt/GDP ↑

성장이 낮은 상태에서 이자비용과 연금지출이 재정을 먼저 점유하면 전력망·데이터센터·연구개발에 투자할 공간은 더욱 줄어든다.


4. 인재 유출은 유럽의 성장기반을 안에서부터 약화시킨다


고령화로 노동력이 감소하는 지역이라면 해외의 젊은 인재를 유치하는 것만큼 기존의 고급인재와 창업가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고급인재가 단순히 개인 자격으로 이주하는 것을 넘어, 창업기업의 본사·경영진·지식재산·자본조달 기능이 함께 미국으로 이동하고 있다.

Draghi Report에 따르면 2008년부터 2021년 사이 유럽에서 설립된 유니콘 147개 가운데 40개가 해외로 본사를 옮겼고, 대부분이 미국으로 이동했다. 2026년 EIB 연구는 EU Scale-up의 약 10%가 해외로 이전하며, 그중 약 85%가 미국을 선택한다고 정리했다.

참고자료: Draghi Report – Part A; EIB, Drivers of Relocation by Innovative EU Startups and Scaleups, 12 January 2026.

기업들이 떠나는 이유는 단순히 세율 하나 때문이 아니다.

미국에는 더 큰 단일시장과 깊은 Venture Capital, 높은 Stock-based Compensation, 빠른 고객확보, 단순한 규제체계, 고급 상업·영업인력이 함께 존재한다. 기업이 미국으로 이동하면 창업자와 핵심 경영진, 연구인력과 후속 인재도 자연스럽게 이동한다.

유럽은 양질의 대학과 연구인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이를 대기업과 글로벌 플랫폼으로 성장시키는 과정이 약하다. 유럽에는 매년 인구 100만 명당 약 850명의 STEM 졸업자가 배출되는 반면 미국은 1,100명을 넘고, 유럽 기업의 약 60%가 기술 부족을 투자 장애요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연구자와 기술인력이 부족한데 기존 인재까지 해외로 이동하면 고령화의 충격은 더욱 커진다.

Ageing ↑ → Tax·Social Contribution Burden ↑ → After-tax Reward ↓ → Talent·Company Exit ↑ → Tax Base ↓ → Remaining Workers’ Burden ↑

이 구조가 위험한 이유는 인재 유출이 평균적으로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이동성이 높은 사람은 대체로 창업가·엔지니어·연구자·금융인력처럼 생산성과 소득, 미래 세수기여도가 높은 계층이다. 이들이 빠져나가면 인구는 소폭 줄어도 혁신역량과 세수 기반은 그보다 훨씬 크게 약해질 수 있다.

유럽에서 교육받은 인재가 미국 기업에서 AI 모델을 개발하고, 유럽에서 시작된 기업이 미국 자본시장에서 성장하며, 그 기업의 지식재산과 시장가치가 미국에 귀속된다면 유럽은 교육비와 초기 연구비를 부담하고 상업화의 과실은 해외에 넘기는 셈이다.

Brain Drain은 단순한 인구 이동이 아니라 미래의 Profit·Tax Revenue·Intellectual Property가 함께 이동하는 현상이다.

 


 


5. AI 경쟁에서 전력은 비용이 아니라 생산능력이다


과거의 디지털경제에서는 전력비가 중요한 비용이기는 했지만 산업의 절대적인 진입장벽은 아니었다. 소프트웨어 기업은 비교적 적은 유형자산으로 전 세계 시장에 서비스를 공급할 수 있었다.

그러나 AI는 다르다.

Firm Power + Grid Connection + Compute + Cooling + Capital → AI Capacity → Model·Cloud Revenue → Productivity·Tax Base

IEA는 세계 데이터센터 전력소비가 2024년 약 415TWh에서 2030년 945TWh로 두 배 이상 증가할 것으로 전망한다. AI 최적화 데이터센터의 전력수요는 같은 기간 네 배 이상 증가할 가능성이 있다.

EU 데이터센터의 전력소비도 2024년 약 70TWh에서 2030년 115TWh로 늘어날 전망이다. 문제는 연간 발전량 전체보다 데이터센터가 원하는 위치에 수백MW에서 수GW의 전력을 얼마나 빠르게 연결할 수 있느냐다.

참고자료: IEA, Energy and AI, 10 April 2025; European Commission, Data Centres, 17 November 2025.

Draghi Report에 따르면 유럽 기업이 부담하는 전력가격은 여전히 미국의 2~3배, 천연가스 가격은 4~5배에 달한다. 여기에 국가별로 분절된 에너지시장, 긴 인허가 기간, 송전망 부족, 높은 세금과 규제비용이 더해진다.

태양광과 풍력 발전량을 늘리는 것만으로 AI 데이터센터에 필요한 전력을 해결할 수는 없다. 데이터센터는 평균적으로 저렴한 전력보다 특정 장소에서 24시간 공급되는 전력과 신속한 계통연결을 필요로 한다.

AI 경쟁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실제 가동 가능한 전력과 계통접속권을 먼저 확보하고, 이를 컴퓨트·클라우드·모델·기업 생산성으로 연결할 수 있는가이다.

프랑스는 원전을 통해 이 경쟁에서 유럽 내 상대적 우위를 가질 수 있다. 반면 독일과 이탈리아는 높은 전력비와 산업용 전력수요, 탈탄소 목표를 동시에 감당해야 한다.


6. 유럽은 AI를 사용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소유하지 못해서 뒤처질 수 있다


유럽 기업의 AI 도입 자체가 매우 느린 것은 아니다.

EIB 조사에서는 첨단 디지털 기술을 사용하는 기업 비중이 EU 77%, 미국 78%로 비슷했고, 생성형 AI 사용률도 EU 37%, 미국 36%로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AI를 두 개 이상의 업무영역에 통합한 기업은 미국이 81%, EU가 55%였다.

참고자료: European Investment Bank, How are EU firms faring with AI?, 8 December 2025.

유럽 기업도 미국산 AI 모델과 클라우드를 사용해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 그러나 컴퓨트·클라우드·모델·데이터센터의 소유권이 미국 기업에 있다면, 생산성 향상의 일부는 클라우드 사용료와 AI 구독료의 형태로 다시 미국에 지급된다.

European AI Adoption ↑ → Productivity Benefit ↑ → Foreign Cloud·Model Payments ↑ → Overseas Profit·Market Value ↑

유럽은 AI의 소비자와 응용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지만 핵심 인프라와 플랫폼을 소유하지 못하면 초과이익·고급일자리·시장가치·세수는 제한적으로만 가져갈 수 있다.

2026 Stanford AI Index에 따르면 미국에는 5,427개의 데이터센터가 존재하며, 이는 다른 어떤 국가보다 10배 이상 많은 수준이다. 2025년 미국의 민간 AI 투자는 2,859억 달러였고, 주목할 만한 Frontier Model의 90% 이상은 민간기업에서 개발됐다.

참고자료: Stanford HAI, 2026 AI Index Report.

EU도 최대 5개의 AI Gigafactory와 19개의 AI Factory를 구축하고 데이터센터 용량을 5~7년 안에 세 배로 확대한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그러나 공식 일정상 첫 AI Gigafactory의 착공은 2027년부터 시작될 예정이다.

참고자료: European Commission, AI Continent Action Plan, AI Gigafactories.

미국 기업들이 이미 대규모 데이터센터와 장기 전력계약을 집행하는 동안 유럽은 이제 공동투자 구조와 입지를 결정하고 있다.

AI 경쟁에서는 이러한 몇 년의 차이가 단순한 시간차로 끝나지 않는다.

Compute·Talent·Users·Cash Flow ↑ → Better Models·Services ↑ → More Investment ↑ → Market Power ↑

선두기업이 확보한 고객·데이터·현금흐름이 다음 투자를 자체적으로 조달하기 때문에 초기의 인프라와 인재 격차는 시간이 흐른다고 자연스럽게 축소되지 않는다.



7. 재정적자가 커질수록 유로화 내부의 균열이 드러난다


독일·프랑스·이탈리아의 재정문제는 각 국가 안에서 끝나지 않는다. 세 나라는 독립적인 통화와 중앙은행을 갖고 있지 않고 하나의 유로와 ECB 통화정책을 공유한다.

만약 각국이 독자적인 통화를 사용했다면 낮은 생산성·높은 재정적자·약한 경상수지를 가진 국가의 통화는 독일 통화에 비해 절하됐을 가능성이 높다. 통화가치 하락은 수입물가를 높이지만, 임금과 수출가격을 상대적으로 낮추면서 경쟁력 조정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유로존에서는 이러한 조정경로가 차단돼 있다.

유로는 국가별 환율을 하나로 묶었지만 국가별 생산성과 재정상태까지 하나로 묶지는 못했다.

따라서 경제력의 차이는 환율이 아니라 다른 가격을 통해 나타난다.

  • 독일 국채와 프랑스·이탈리아 국채의 금리 차이

  • 국가별 은행의 자금조달 비용

  • 기업대출 금리와 신용공급 격차

  • 임금 억제와 실업을 통한 Internal Devaluation

  • EU 재정준칙과 긴축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

  • ECB의 국채매입과 공동부채를 둘러싼 국가 간 분쟁

경제가 안정적이고 금리가 낮을 때는 하나의 통화가 제공하는 편익이 이러한 차이를 가릴 수 있다. 그러나 공공부채와 재정적자가 확대되고 장기금리가 높아지면 시장은 다시 국가별 상환능력을 구분하기 시작한다.

유럽위원회의 2025 Debt Sustainability Monitor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단기 자금조달 수요가 높은 수준을 유지할 것으로 평가했다. 또한 현행 정책이 유지될 경우 향후 10년 동안 EU 부채비율은 상승하며, 12개 회원국이 중기적으로 높은 재정위험에 놓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참고자료: European Commission, Debt Sustainability Monitor 2025, 12 February 2026.

이때 ECB는 어려운 선택에 직면한다.

프랑스·이탈리아 국채금리가 빠르게 오르는 것을 방치하면 은행과 기업의 조달비용이 상승하고 유로존 금융시장이 분절될 수 있다. 반대로 ECB가 특정 국가의 국채를 지속적으로 매입하면 재정규율이 약한 국가의 비용을 유로존 전체가 부담한다는 반발이 커질 수 있다.

ECB가 2022년 도입한 Transmission Protection Instrument 자체가 이러한 구조적 취약성을 보여준다. ECB는 정당화되지 않은 시장불안으로 특정 국가의 조달여건이 악화될 경우 국채를 매입할 수 있지만, 지원 대상국의 재정건전성과 EU 재정규율 준수를 조건으로 제시하고 있다.

참고자료: ECB, The Transmission Protection Instrument, 21 July 2022.

따라서 앞으로 유로존의 균열은 반드시 유로화의 즉각적인 해체로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겉으로는 하나의 환율을 유지하면서 내부적으로는 국채금리·은행 신용·성장률·실업률의 격차가 벌어지는 형태가 될 가능성이 높다.

One Currency + Divergent Fiscal Paths → Sovereign Spread ↑ → Financial Fragmentation ↑ → ECB Intervention Pressure ↑ → Political Conflict ↑

결국 유럽은 두 가지 방향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하나는 공동부채·공동재정·재정이전을 확대해 통화통합을 재정통합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국가별 재정규율을 강화하고 고부채 국가에 더 강한 지출조정과 구조개혁을 요구하는 것이다.

전자는 독일과 북유럽 납세자의 반발을 불러올 수 있고, 후자는 프랑스·이탈리아를 비롯한 고부채 국가의 정치적 저항을 확대할 수 있다.

고령화·국방·에너지·AI 투자로 모든 국가의 재정수요가 동시에 증가하는 환경에서는 어느 쪽도 쉽게 선택하기 어렵다.



8. 리콴유가 오래전에 지적했던 유로화의 근본 문제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는 2011년 유럽 재정위기가 한창이던 시기에 유로화의 근본 문제를 매우 직관적으로 설명했다.

그는 유로가 서로 다른 속도로 움직이는 국가들을 같은 드러머에 맞춰 행진하도록 만든다고 지적했다. 그리스가 독일과 같은 속도와 규율로 움직일 수 없는데도 하나의 통화와 통화정책을 적용하면 문제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취지였다.

또한 저축성향과 지출습관, 재정규율이 서로 다른 국가들을 하나의 단일한 유럽으로 묶는 것은 지나치게 어렵고, 결국 2단계 또는 3단계로 나뉜 유럽이 나타날 수 있다고 보았다.

참고자료: Lee Kuan Yew School of Public Policy, Lee Kuan Yew Reflects on Europe, 26 December 2011.

리콴유는 유로화가 붕괴할 가능성까지 언급했지만, 그 전망은 아직 현실화하지 않았다. 유럽은 ESM과 은행감독체계, ECB의 OMT·PEPP·TPI, 코로나 이후 공동부채를 도입하며 제도를 보완했다.

그러나 유로가 생존했다는 사실이 그가 지적한 문제가 해결됐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유럽은 통화통합을 유지하기 위해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더 많은 중앙은행 개입과 공동보증, 재정이전 장치를 추가해 왔다. 통합된 것은 각국의 경제구조가 아니라, 경제구조의 차이에서 발생한 위험을 처리하는 제도에 가까웠다.

리콴유의 통찰은 유로화 자체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유럽이 높은 생활수준과 교육을 유지하더라도 미국·중국과 같은 거대한 단일국가에 비해 점차 작은 행위자로 밀려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유럽이 이민을 필요로 하면서도 정치적으로 이를 수용하기 어려운 Catch-22에 빠질 가능성도 언급했다.

그가 바라본 핵심은 유럽의 즉각적인 빈곤화가 아니었다.

각국이 여전히 비교적 잘사는 사회로 남더라도,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통합하지 못하면 세계의 규칙과 기술을 결정하는 주체에서 점차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AI 경쟁은 이 경고를 더욱 현실적인 문제로 만들고 있다.

미국과 중국은 국가 단위에서 전력·컴퓨트·국방·산업정책과 자본시장을 연결할 수 있다. 반면 유럽은 공동의 AI 전략을 발표하더라도 실제 전력정책·인허가·조세·재정·노동법은 상당 부분 국가별로 분절돼 있다.

리콴유가 지적했던 다른 속도와 규율을 가진 국가들을 하나의 체제로 움직이게 하는 어려움이 이제는 국채와 환율을 넘어 데이터센터·전력망·AI 투자에서도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9. 극우정당의 부상은 원인이라기보다 분배갈등의 증상이다


독일·프랑스·이탈리아에서 우파와 극우정당이 성장한 현상도 이러한 경제구조와 분리해 보기 어렵다.

독일 AfD의 정당득표율은 2021년 **10.4%**에서 2025년 **20.8%**로 두 배가 됐다. 프랑스에서는 2024년 총선 1차 투표에서 국민연합이 **29.3%**를 얻었고, 국민연합과 우파연합을 합하면 약 3분의 1의 득표를 기록했다.

참고자료: German Federal Returning Officer, 2025 Election; France Ministry of the Interior, 2024 Legislative Election.

물론 이를 경제적 불만 하나로 설명할 수는 없다. 이민·치안·문화적 정체성·EU 통합에 대한 반발도 중요한 원인이다.

그러나 저성장 환경에서는 이 모든 갈등이 더욱 격해진다. 성장할 때는 고령층의 복지, 노동자의 임금, 기업의 이윤, 이민자의 사회통합을 어느 정도 함께 충족시킬 수 있지만, 경제가 정체되면 모든 정책이 기존 소득을 둘러싼 제로섬 경쟁으로 바뀐다.

Low Growth → Distribution Conflict ↑ → Political Fragmentation ↑ → Reform Difficulty ↑ → Lower Investment → Lower Growth

고령화로 이민자가 필요하지만 이민 확대는 극우정당의 지지를 높일 수 있다. 복지지출을 줄여야 하지만 복지축소는 좌우 양쪽의 정치적 반발을 부른다. 기업과 인재를 붙잡기 위해 세금을 낮춰야 하지만 재정적자가 확대되면 세수 확보가 더 중요해진다.

유럽은 서로 충돌하는 정책을 동시에 추진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극우정당의 부상은 유럽 경제를 망가뜨린 최초의 원인이라기보다 기존 정치가 성장과 분배, 이민과 고령화의 균형을 더 이상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신호에 가깝다.



결론: 유럽은 무너지기보다 상대적으로 작아질 가능성이 높다


유럽이 곧 붕괴하거나 AI 경쟁에서 완전히 탈락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유럽에는 ASML을 비롯한 반도체 장비기업, Siemens와 Schneider Electric 같은 산업자동화·전력기업, 강한 제조업 기반, 우수한 연구인력과 높은 가계저축이 존재한다. 프랑스의 원전과 저탄소 전력은 AI 데이터센터 유치에서 분명한 경쟁력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유럽은 산업용 AI·로보틱스·자동차·에너지 관리·제약과 과학 분야에서 상당한 생산성 향상을 만들어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현재의 제도와 투자속도가 유지된다는 Base Case에서는 유럽이 Frontier Model과 Cloud·Compute를 지배하는 지역으로 부상하기보다, 미국산 AI 인프라를 활용해 기존 산업의 경쟁력을 방어하는 지역에 머물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유럽의 미래를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 단어는 붕괴보다 상대적 후퇴일 수 있다.

미국과 중국은 더 많은 자본을 전력·반도체·데이터센터·AI 모델에 투입하고 그 투자에서 발생한 이익을 다시 다음 인프라에 투입한다. 반면 유럽은 연금·의료·국방·에너지 보조금과 이자비용을 부담한 뒤 남은 재정공간 안에서 AI 투자를 결정해야 한다.

US·China: Capital → Power·Compute → AI Growth → Profit·Tax Base → Reinvestment

Europe: Welfare·Interest·Defence ↑ → Fiscal Space ↓ → AI Investment Delay → Talent·Technology Outflow ↑ → Growth Leakage

재정적자가 확대될수록 국가별 경제력의 차이는 유로화라는 단일 환율 아래에서 국채금리와 신용비용, 긴축부담의 차이로 나타날 것이다. 이를 막으려면 더 강한 공동재정과 부채의 공동부담이 필요하지만, 이는 다시 국가 간 정치적 갈등을 키울 수 있다.

유럽의 근본적인 문제는 복지국가를 선택했다는 데 있지 않다.

복지국가를 유지하려면 더 높은 생산성이 필요한데, 기존 복지체제를 지키는 데 자본과 정치적 역량을 우선적으로 사용하면서 그 생산성을 만들어낼 전력·AI·기업·인재 투자가 늦어지고 있다는 데 있다.

AI 시대에는 이러한 모순을 장기간 가릴 수 없다.

AI는 소프트웨어처럼 국경을 넘어 확산되지만, 그 AI를 생산하는 전력·컴퓨트·데이터센터·클라우드·자본과 고급인재는 특정 국가와 기업에 귀속된다.

유럽 국민과 기업도 AI를 사용하겠지만 핵심 인프라와 기업을 소유하지 못한다면 생산성 향상의 과실 중 상당 부분을 해외 플랫폼에 지불하게 된다. 여기에 유럽에서 교육받은 인재와 유럽에서 시작된 기업마저 미국으로 이동한다면, 미래의 기업이익과 시장가치·세수까지 함께 이전된다.

유럽은 AI를 사용하지 못해서 뒤처지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AI를 사용하는 시대에도 전력·컴퓨트·클라우드·모델과 인재를 충분히 소유하지 못함으로써 뒤처질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유럽에 남는 것은 높은 사회비용과 공공부채, 국가별 재정갈등, 값비싼 에너지와 수입한 AI 서비스가 되고, AI가 만들어내는 초과이익과 미래 세수는 미국과 일부 선도기업에 더욱 집중될 수 있다.

리콴유가 오래전에 예상한 것처럼 유럽은 여전히 교육수준이 높고 상당히 풍요로운 지역으로 남을 수 있다. 다만 미국과 중국이 새로운 기술과 산업질서를 결정하는 동안, 유럽은 그 질서를 만드는 주체가 아니라 규제하고 수입하며 비용을 분담하는 지역으로 점차 밀려날 수 있다.

이전 글에서 언급했던 Public Debt의 사회화와 AI 성장 과실의 집중화가 가장 선명하게 나타날 수 있는 지역이 바로 유럽일지도 모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