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5월 10일 일요일

이모저모

문득 떠오른 오래전 면접 기억


가끔 블로그 글 중 어떤 글이 가장 많이 읽혔는지 확인해볼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압도적으로 많이 읽힌 글은, 이제 10년쯤 지난 자산운용사 면접 이야기다.

왜 그 글이 아직도 꾸준히 읽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누군가에게는 그 시절의 나처럼, 운용사 면접을 앞두고 어떤 회사를 선택해야 할지 고민하는 시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문득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대단한 교훈을 남기려는 것은 아니고, 그때의 장면들이 이상하게 선명하게 남아 있어 한 번쯤 기록해두고 싶어졌다.

운이 좋게도 한때 세 군데 자산운용사에 동시에 합격했던 적이 있다. 한 곳은 면접 당시 분위기가 썩 좋지 않았다. 서로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분명했고, 나 역시 자연스럽게 일찍부터 거절의 의사를 내비쳤던 기억이 있다.

마지막까지 남은 곳은 두 군데였다. 한 곳은 대형사였고, 다른 한 곳은 이제 막 출발하려던 신생 자산운용사였다.

당시 나는 잠시 업계를 떠났다가, 주식운용업계를 빙 돌아 겨우 다시 돌아온 시점이었다. 그래서 무엇보다 안정성을 우선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업계 안에 자리를 잡는 것이 중요했고, 그때의 나에게 대형사를 선택하는 것은 가장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지금 돌아봐도 그 선택을 후회한 적은 없다. 그때의 선택이 이어졌기 때문에 지금의 운용사에 몸담을 수 있었고, 지금의 회사와도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 나는 지금의 자리에도 매우 만족하고 있다.

다만 마지막까지 마음에 걸렸던 곳이 있었다. 바로 그 신생 자산운용사였다.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고 찾아갔는데, 그 사무실 풍경이 아직도 꽤 선명하게 기억난다. 정말 텅 빈 사무실 한가운데에 내 또래로 보이는 덩치 큰 친구가 책상 하나와 컴퓨터 한 대를 두고 주식창을 띄워놓고 있었다.

그 맞은편에는 백오피스 지원부서로 보이는 두 분이 분주하게 여기저기를 오가고 있었다. 모든 것이 막 시작되는 회사 특유의 어수선함과 긴장감을 그대로 품고 있었다.

대표로 보이는 분께서 사무실 한쪽에 덩그러니 놓인 소파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손짓하셨다. 그리고 별다른 인사말도 없이 대뜸 물으셨다.

“이거 삼성전기 보고서 직접 썼어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조금 당황해서 답했다.

“네? 아, 네…”

그러자 그분이 짧게 말씀하셨다.

“그 보고서가 살아있어.”

나는 얼떨결에 “감사합니다”라고 답했다.

곧바로 이어진 질문은 더 직접적이었다.

“언제 입사 가능해요?”

그때는 아직 다른 곳 면접도 남아 있었기에 조심스럽게 말씀드렸다.

“그… 아직 제가 면접 보는 곳이 또 따로 있어서요.”

그러자 대표님은 조금 더 솔직하게 말씀하셨다.

“우리가 지금 운용사 인가를 앞두고 있는데, 투자자산운용사 보유 운용등록인력이 한 명 부족해서 그래요. 그냥 빨리 우리 회사로 합류하면 안 될까?”

나는 결국 머뭇거리다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다.

“그… 저… 죄송하게 됐습니다.”

이후 나는 최종적으로 대형사 입사를 결정했다. 그리고 전화로 아쉽지만 입사하지 못할 것 같다고 연락드렸다. 전화 너머로 “아쉽게 됐다”는 말씀과 함께, 한숨 비슷한 소리가 들려왔던 기억이 난다.

그 뒤로 그 일은 꽤 오랫동안 까맣게 잊고 살았다.

그런데 한참 시간이 지난 뒤, 헤지펀드 리그테이블에서 그때의 그 신생운용사가 엄청난 수익률로 갑자기 등장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때 텅 빈 사무실에서 컴퓨터 한 대를 앞에 두고 주식창을 보고 있던, 내 또래처럼 보였던 덩치 큰 친구. 그리고 그 대표님. 그분들이 그렇게 운용을 잘하는 사람들이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아마 그때의 나는 운용사의 겉모습을 먼저 봤던 것 같다. AUM, 브랜드, 사무실 규모, 조직의 안정성, 시장에서의 인지도 같은 것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당시 내 상황에서는 충분히 자연스러운 판단이었다. 다시 업계로 돌아온 입장에서 안정적인 선택지가 더 크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운용업에서 중요한 것은 꼭 밖에서 보이는 크기와 일치하지는 않았다. 운용을 잘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조용한 곳에 있을 수 있고, 아직 간판이 크지 않은 회사 안에도 좋은 철학과 실력 있는 운용자가 있을 수 있다. 텅 빈 사무실, 책상 하나, 컴퓨터 한 대로 시작한 회사가 훗날 리그테이블 상단에 이름을 올릴 수도 있다.

최근 들어서는 이 생각이 더 자주 든다. 특히 agent AI 시대로 넘어오면서, 큰 조직이 항상 유리하지만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예전에는 큰 조직이 더 많은 리서치 자원, 더 넓은 네트워크, 더 강한 시스템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한 우위를 가졌다. 그런데 AI를 리서치와 운용에 깊이 적용할수록, 오히려 큰 조직의 복잡성이 병목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조직이 커질수록 의사결정 단계가 늘어난다. 보고와 검토, 합의와 조율에 시간이 들어간다. 새로운 도구를 도입하고 실제 운용 프로세스에 녹여내는 속도도 느려질 수 있다. 특히 AI처럼 활용 방식이 빠르게 바뀌는 기술에서는 이 속도 차이가 생각보다 큰 격차를 만든다.

무엇보다 큰 조직일수록 BM 인덱스와 시장 수익률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 조직이 크고 운용 규모가 클수록, 개인의 판단보다 조직의 평균적인 의사결정이 앞에 놓이기 쉽다. 성과 평가의 기준이 촘촘해질수록 시장 수익률에서 크게 벗어나기 어렵고, 특정 테마가 단기적으로 밀릴 때 내부 설득의 부담도 커진다.

이 생각은 내가 AI 관련 주식을 바라보며 겪었던 시간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2023년 이후 AI가 본격적으로 부상하면서 여러 테크 주식의 부침이 상당했던 시기가 있었다. AI라는 거대한 흐름이 시작되는 듯했지만, 초반의 결과물은 생각보다 기대에 못 미쳤다. 세상이 당장 바뀔 것처럼 보이다가도, 막상 눈앞의 결과물은 어딘가 부족해 보였다.

시장도 흔들렸다. AI 테크 주식이 연일 크게 밀렸고, 여기에 트럼프 관세 이슈까지 겹치며 투자심리는 더 나빠졌다. 반면 그 시기에는 K뷰티, K라면 같은 B2C 주식들이 계속 날아갔다. 지금과는 정반대의 분위기였다. 그 흐름을 보면서 나 역시 FOMO를 느끼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회사에서 나와 지하철역까지 걷는 15분 남짓한 시간 동안, 매일 같은 질문을 되뇌었다.

“내가 잘못 보고 있는 걸까.”

그 짧은 길 위에서 수없이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집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나도, 다시 잠들 때까지 머릿속에서는 같은 물음이 이어졌다.

AI를 믿어도 되는 걸까.
시장이 틀린 걸까, 내가 틀린 걸까.
내가 너무 앞서 보고 있는 걸까, 아니면 엉뚱한 곳을 보고 있는 걸까.

답 없는 질문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잠들며 AI를 생각했고, 다음 날 눈을 뜨면 다시 그 생각을 이어갔다. 말 그대로 무한 도돌이표 같은 시간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 시간은 단순히 한 테마를 붙들고 버틴 시간이 아니었다. AI라는 변화가 실제 산업과 실적, 밸류체인과 포트폴리오에 어떤 방식으로 연결될지 계속 확인하고, 의심하고, 다시 점검하는 시간이었다.

만약 그때 내가 조직이 크고, BM 인덱스 펀드를 중시하는 대형사 안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아마 매일같이 “내가 잘못 보고 있는 걸까”라는 고민을 오래 붙들고 있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조직의 방향, BM 대비 성과, 내부 설득의 부담, 단기 수익률 압박 속에서 결국 시장 수익률만 좇다가 어정쩡한 펀드 수익률을 기록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lean한 조직의 강점은 단순히 의사결정이 빠르다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작은 조직은 때로 더 오래 고민할 수 있다. 서로의 투자 철학을 이해하고 있다면, 단기 성과 압박 속에서도 일정한 인내를 유지할 수 있다. 시장이 잠시 반대로 움직일 때도 왜 이 포지션을 들고 있는지, 무엇을 확인해야 판단을 바꿀지, 어디까지를 변동성으로 보고 어디부터를 오류로 볼지 더 솔직하게 토론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도 AI를 최대한 활용해 리서치와 운용에 적용할수록 이 차이를 매일 실감한다.

AI가 단순히 자료 검색을 빠르게 해주는 도구에 그치지 않고, 산업 구조를 재정리하고, 기업 간 비교를 확장하고, 가설을 점검하고, 실적 모델과 시장 시나리오를 반복적으로 업데이트하는 역할까지 수행하기 시작하면 조직의 크기보다 활용 속도와 밀도가 더 중요해진다.

소수의 결이 맞는 사람들로 구성된 조직은 아이디어가 리서치로 이어지고, 리서치가 포트폴리오 판단으로 연결되는 시간이 짧다. 커뮤니케이션 비용이 낮고, 시행착오를 빠르게 반복할 수 있으며, 시장 변화에 맞춰 관점과 포지션을 기민하게 조정할 수 있다. 적은 인원으로도 더 넓은 커버리지를 가져갈 수 있고, 고정비 부담을 낮게 유지하면서도 판단의 속도와 깊이를 동시에 높일 수 있다.




여의도 바닥은 좁다. 한두 다리만 건너도 증권사 브로커나, 어쩌다 오가며 안면을 튼 사람들을 통해 이런저런 이야기가 들린다. 최근 여의도 주식형 펀드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매니저들의 연령대가 대체로 90년대 초반생이 많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들도 비슷한 시기에 나와 같은 고민을 하며, 지금의 P/F를 구성하게 이르게 된 걸까?

주식운용 매니저의 전성기는 보통 30대 중후반부터 40대 중후반까지라고들 한다. 생각해보면 우리 역시 운 좋게도 딱 그 연령대에 접어드는 시점에 AI라는 거대한 흐름을 좋은 인연으로 맺은 회사와 함께 마주할 수 있게 돼었다. 

조금 늦었다고 생각했던 순간도 있었고, 이미 지나간 기회를 놓쳤다고 느꼈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어쩌면 우리는 그나마 막차라도 탈 수 있는 시점에 시장 안에 남아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최근 NVIDIA의 젠슨 황이 졸업생들에게 AI는 지금까지 기득권층에게 몰려 있던 지식과 경험의 세팅값을 모두 ‘0’으로 되돌리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모두가 다시 같은 출발선 위에 서게 된다는 취지의 말이었다.

어쩌면 지금의 AI 변화는 운용업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만들고 있는지 모른다. 과거의 경력, 조직의 규모, 기존의 리서치 방식, 오래 축적된 네트워크는 여전히 중요하다. 다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시간이 오고 있다. AI를 얼마나 빨리 받아들이고, 얼마나 깊게 활용하며, 그것을 실제 포트폴리오 판단으로 연결할 수 있는지가 새로운 차이를 만들고 있다.

나는 앞으로도 AI를 최대한 활용해 리서치와 운용에 적용해보고 싶다. AI의 발전 방향을 빠르게 따라가고, 그 변화가 실제 산업과 기업 실적, 그리고 포트폴리오에 어떤 방식으로 반영될 수 있을지 계속 확인해보고 싶다.

어느 정도의 지식과 경험은 쌓였고, 동시에 아직 새로운 변화에 반응할 수 있는 체력도 남아 있는 지금의 시기가 어쩌면 커리어 전체를 통틀어 꽤 소중한 구간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운 좋게  찾아온 이 거대한 AI WAVE가 조금 더 길게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동시에 그 파도가 이어지는 동안, 나 역시 조금이라도 더 오래 그 위에 올라타 있을 수 있었으면 한다.

예전 면접 글이 아직도 꾸준히 읽히는 것을 보며, 갑자기 그때의 장면들이 떠올랐다.

텅 빈 사무실, 컴퓨터 한 대, 그리고 주식창을 바라보던 내 또래의 친구 한 명. 이상하게도 그 모습이 지금의 내 모습과 겹쳐 보였다. 어쩌면 그때 그 사람도 지금의 나처럼 매일 시장을 보고, 스스로의 판단을 의심하고, 다시 확인하며 버티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기억이 오래전 일처럼 그냥 지나가지만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한 번 적어두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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