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미 대미투자 협상과 일본의 대미투자 내용을 함께 보면서 느꼈던 점을 정리해본다.
미국이 AI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왜 더 많은 발전소와 전력망을 필요로 하는지는 이전 글에서 이미 다뤘다.
| 이전 글 | 주요 내용 |
|---|---|
| 생각정리 359 (* AI Is the Exit, G20) | 미국이 AI를 통해 성장률을 높이려는 이유 |
| 생각정리 357 (* Beyond the Cycle, k-EPC) | AI 전력 인프라와 한국 EPC의 가치 |
| 생각정리 340 (* BTM, Gas Turbin, Gas Engine, Electrical Equipment) | 전력 부족과 가스발전·전력기기의 역할 |
이번 글에서 정리하고 싶은 핵심은 조금 다르다.
미국이 한국과 일본의 자본을 이용해 발전소를 건설한다면, 그 대가로 한국이 얻게 되는 것은 단순한 공사 한두 건이 아닐 수 있다.
미국에서 AP1000을 실제로 건설하고, 장기적으로 APR1400까지 배치할 수 있다면 한국 EPC 기업은 미국 원전 시공 레퍼런스를 확보하게 된다.
그리고 그 레퍼런스는 미국뿐 아니라 캐나다·유럽·아시아·중동으로 진입할 수 있는 일종의 보증서가 된다.
결국 이번 대미투자 협상은 미국 원전 몇 기를 수주하는 문제가 아니다.
K-EPC가 앞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글로벌 원전 EPC 시장의 TAM을 여는 시작점에 가깝다.
1. 대미투자의 핵심은 투자금액보다 Reference다
한국이 약속한 대미투자 규모는 총 3,500억달러다.
이 가운데 1,500억달러는 조선업, 나머지 2,000억달러는 원전·반도체·바이오 등 전략산업에 배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보도에서는 전략산업 투자 가운데 최대 1,200억달러를 미국 대형원전 8기에, 약 200억~223억달러를 텍사스 Encinal 발전사업에 투입하는 방안이 거론되고 있다.
WSJ, 한·미 대미투자 협상
Reuters, 텍사스 가스발전 투자 논의
원전과 가스발전 사업을 단순 합산하면 약 1,423억달러다.
전략산업 투자액의 약 70%가 발전설비에 집중되는 셈이다.
가스복합화력은 원전이 완공되기 전까지 미국의 AI 데이터센터에 전력을 공급하는 Bridge Power다.
따라서 가스터빈·HRSG·발전기·변압기는 상대적으로 빠르게 발주와 실적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반면 원전의 의미는 단기 실적보다 훨씬 길다.
미국 원전 프로젝트를 완공하면 한국 기업은 세계에서 가장 까다로운 인허가·품질·보험·노무환경을 통과했다는 시공 레퍼런스를 얻게 된다.
결국 이번 대미투자에서 가장 중요한 자산은 투자원금 자체가 아니다.
미국에서 원전을 실제로 완공했다는 Reference다.
2. 일본은 Capital, 한국은 Execution이다
일본은 대미투자 자금 가운데 약 3,200억달러를 미국 원전 건설 등에 배정하는 방안을 논의해 왔다.
일본의 보험사·은행·정책금융기관은 수십 년 동안 자금을 공급할 수 있는 장기금융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일본 역시 최근 해외에서 다수의 대형원전을 연속적으로 건설하고 완공한 경험은 부족하다.
반면 한국은 APR1400을 국내에서 반복 건설했고, UAE 바라카에서는 해외 최초 원전 도입국에 1,400MW급 원전 4기를 하나의 표준화된 프로그램으로 완공했다.
바라카 원전은 약 200억달러, 총 5.6GW 규모다.
2024년 4호기까지 상업운전에 들어가면서 UAE 전력수요의 최대 25%를 공급할 수 있게 됐다.
현대건설 바라카 프로젝트
UAE의 IAEA 바라카 4호기 공식 발표
따라서 미국이 동맹국을 통해 원전 공급망을 재건하려 한다면 역할은 자연스럽게 나뉜다.
일본이 Capital을 공급하고, 미국이 Technology와 Demand를 제공하며, 한국이 실제 발전소를 완공하는 Execution을 맡는 구조다.
3. AP1000은 미국 Reference, APR1400은 Full Value Chain이다
미국 대형원전 사업에서 가장 먼저 적용될 가능성이 높은 노형은 Westinghouse의 AP1000이다.
AP1000은 미국 NRC 인허가를 이미 확보했고 Vogtle 3·4호기의 상업운전 경험도 있다.
그러나 미국은 지난 수십 년 동안 대형원전 건설이 중단되면서 연속 시공이 가능한 인력과 공급망이 크게 약화됐다.
따라서 Westinghouse가 원천설계를 제공하고, 한국 기업이 시공관리와 기자재 공급을 담당하는 구조가 현실적이다.
APR1400은 사업범위가 다르다.
APR1400이 미국에 배치되면 한국 기업은 종합설계부터 주기기·터빈·발전기·건설·시운전까지 더 넓은 범위에 참여할 수 있다.
| AP1000과 APR1400의 수주범위 비교 |
단기적으로 AP1000이 더 많이 적용되더라도 반드시 불리한 것은 아니다.
한국 EPC 기업은 AP1000을 통해 미국의 인허가 기준과 현장관리, 공급망과 노무환경을 경험할 수 있다.
그 경험이 쌓이면 다음 AP1000 프로젝트에서 한국 기업의 사업범위가 확대되고, SMR과 APR1400까지 연결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따라서 AP1000과 APR1400은 서로 경쟁하는 선택지라기보다 시간순서에 가깝다.
미국 AP1000을 제대로 완공하는 것이 먼저다.
그 Reference가 APR1400의 미국 진입 가능성까지 높인다.
4. 서방 원전시장의 병목은 Technology보다 Execution이다
전 세계에서 원전을 건설할 수 있는 국가는 많아 보인다.
그러나 중국과 러시아는 자국 국영금융·연료·기자재·EPC를 결합한 독립적인 공급망이다.
서방 국가가 중국이나 러시아에 핵심 전력 인프라를 맡기기는 정치적으로 어렵다.
프랑스는 EPR 원천기술과 Framatome 공급망을 보유하고 있지만 최근 건설실적은 원가와 공기 측면에서 신뢰도가 크게 훼손됐다.
프랑스는 자국 EPR2와 영국 Sizewell C 사업을 프랑스 및 현지 건설사 중심으로 진행할 가능성이 높다.
캐나다는 AtkinsRéalis·Aecon·Kiewit, 일본은 자국 중공업과 건설사, 인도는 NPCIL·L&T를 비롯한 자국 공급망 중심으로 원전을 건설하고 있다.
특히 인도는 PHWR을 중심으로 다수의 원전을 반복 건설할 수 있는 독자적인 기술과 시공경험을 보유하고 있다.
다만 원전 발주와 기자재·건설 물량의 상당 부분을 자국 기업에 배분하고 있어, 글로벌 턴키 원전 EPC 입찰에서 한국과 직접 경쟁하는 공급망으로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앞으로 원전시장의 병목은 원자로 설계도가 아니다.
그 설계도를 실제 발전소로 완성할 수 있는 사람·공급망·프로젝트 관리능력이다.
인도처럼 자국 안에서 원전을 반복 건설할 수 있는 국가는 존재한다.
그러나 중국과 러시아를 제외한 글로벌 수출시장에서 최근 다수의 대형원전을 반복 건설했고, 해외에서도 4기를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완공했으며, 다시 유럽 턴키 계약까지 확보한 공급망은 사실상 한국이 유일하다.
원전산업에서도 가장 부족한 것은 Execution이다.
5. 미국이 서방 원전시장의 출발점이다
미국 정부는 현재 약 100GW인 원전 발전용량을 2050년까지 400GW로 확대한다는 정책목표를 설정했다.
목표를 달성하려면 신규 건설·기존 원전 재가동·출력증강·SMR 배치를 모두 동원해야 한다.
이 가운데 가장 구체적인 대형원전 프로그램은 AP1000 10기다.
미국 에너지부는 2026년 6월, 5개 부지에서 AP1000 10기·총 11GW의 공급망을 구축하기 위해 175억달러의 조건부 금융지원을 발표했다.
400GW는 정책목표이지 확정된 Backlog가 아니다.
그러나 미국이 당장 건설할 수 있는 AP1000 10기만 보더라도 최근 서방 원전시장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대규모 연속발주다.
현대건설은 이미 Fermi America의 AP1000 4기·약 4GW 사업에서 FEED를 수행하고 있다.
또한 Holtec과 Palisades 부지에 SMR-300 2기·약 600MW를 건설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아직 Fermi는 FEED, Palisades SMR은 인허가와 개발단계다.
확정된 EPC Backlog로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미국 대형원전과 SMR에서 한국 건설사가 초기설계부터 참여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중요하다.
미국 첫 프로젝트가 완공되면 그다음 프로젝트부터는 한국 기업의 시공능력을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어진다.
미국 Reference가 다음 수주의 보증이 되는 것이다.
6. Reference가 열어주는 해외 원전 TAM
미국 원전 Reference가 중요한 이유는 미국시장 하나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의 AP1000은 폴란드와 불가리아에서 이미 채택됐고, 스웨덴·핀란드에서도 검토되고 있다.
Westinghouse와 현대건설은 북유럽 AP1000 사업을 공동으로 추진하는 협약을 체결했다.
Westinghouse–현대건설 북유럽 AP1000 협력
체코에서는 KHNP가 두코바니 2기·총 2.126GW 턴키 계약을 확보했다.
1기당 가격은 약 2,000억코루나이며 2029년 착공, 2036년 첫 호기 시험운전을 목표로 한다.
계약에는 테멜린 2기 추가 옵션도 포함돼 있다.
불가리아에서는 Westinghouse와 현대건설이 Kozloduy 7·8호기 엔지니어링을 진행하고 있다.
폴란드는 첫 원전에 AP1000 3기·최대 3.75GW를 적용하고 두 번째 대형원전도 준비하고 있다.
아시아와 중동에서도 베트남·사우디아라비아·UAE 후속 원전이 잠재시장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PWR 2기를 검토하고 있으며, 베트남은 2035년까지 Ninh Thuan 원전 2개 사업의 가동을 목표로 하고 있다.
발표된 계획을 모두 더하면 상당히 큰 숫자가 나온다.
그러나 원전은 발표됐다고 모두 건설되는 사업이 아니다.
따라서 중국·러시아 공급망과 프랑스·인도·일본의 내수시장을 제외하고, 2040년 이전 착공 가능성과 금융조달 가능성을 반영해 시장을 다시 계산해봤다.
세계원자력협회의 국가별 건설·계획·제안 원전 데이터를 기초로 하되, 확정사업과 제안사업에 서로 다른 착공확률을 적용했다.
| World Nuclear Association, 세계 신규 원전 계획 |
2040년까지 실제 착공 또는 건설단계에 진입할 가능성이 있는 시장은 약 45~70GW로 추정된다.
대형원전과 SMR의 지역별 공사비 차이를 반영하면 총사업비는 약 4,500억~7,500억달러다.
이것이 원전 발전사업 전체의 TAM이다.
그러나 토지·금융비용·사업주 비용과 현지조달을 제외하면 이 금액 전체가 해외 EPC 기업의 매출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설계·조달·건설 기업이 실제로 경쟁할 수 있는 시장은 총사업비의 약 50~60%로 추정할 수 있다.
한국 EPC 업체가 확보한 수주액만 놓고 보면 대략적인 구조는 다음과 같다.
설계 13% → 주기기·발전기 51% → 시공 36%
따라서 글로벌 원전 EPC·설계 사업자들의 실질 수주 Pool은 약 2,500억~4,500억달러다.
결국 프랑스 내수와 중국·러시아의 폐쇄형 공급망을 제외하면 K-EPC는 틈새시장 사업자가 아니다.
향후 서방 신규 원전 EPC 시장에서 가장 큰 수주 Pool을 가져갈 수 있는 공급망 가운데 하나다.
7. 미국 원전은 TAM을 Backlog로 바꾸는 첫 번째 관문이다
아직 위 숫자는 TAM이지 확정 수주잔고가 아니다.
프로젝트가 실적으로 전환되려면 정부 발표에서 FID, 금융조달, 공급사 선정, EPC 계약, 착공으로 이동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미국 프로젝트의 의미가 다시 커진다.
미국에서 AP1000을 제대로 완공하면 현대건설을 비롯한 K-EPC 기업은 미국·폴란드·불가리아·북유럽에서 Westinghouse의 기본 시공 파트너가 될 수 있다.
APR1400이 미국에 배치되면 한전기술·두산에너빌리티·한국 건설사까지 포함하는 한국 원전 공급망 전체의 사업범위가 커진다.
SMR에서는 Holtec·X-energy 등 미국 노형 개발사가 기술을 제공하고, 한국 EPC 기업이 발전소의 표준설계와 실제 건설을 담당하는 구조가 가능하다.
원전은 첫 번째 호기가 가장 어렵다.
설계가 바뀌고, 현지 규제에 대응해야 하며, 새로운 공급망과 노동력을 구축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첫 번째 호기를 완공한 뒤 동일한 노형을 반복 건설하면 설계변경이 줄어들고, 기자재를 일괄 발주할 수 있으며, 인력의 생산성이 개선된다.
미국 DOE도 Vogtle 4호기의 생산성이 3호기보다 약 30% 높아지고 건설비는 약 20% 감소했다고 분석했다.
따라서 미국의 첫 AP1000 사업은 단순한 1회성 EPC 공사가 아니다.
그다음 10기, 20기의 원가와 납기를 낮추는 Learning Curve의 시작점이다.
8. 어떤 K-EPC 기업이 먼저 가져가는가
현재 가장 앞선 기업은 현대건설이다.
바라카 원전 시공경험을 기반으로 Fermi America AP1000, Holtec SMR-300, 불가리아 Kozloduy, 스웨덴·핀란드 AP1000 사업에 동시에 접근하고 있다.
삼성물산은 바라카 시공경험과 ENEC 협력, 루마니아 Cernavoda 및 SMR 관련 프로젝트를 통해 사업기회를 확대하고 있다.
대우건설은 국내 원전 시공경험과 체코 원전 공급망 참여를 기반으로 유럽·미국·베트남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DL이앤씨는 X-energy 투자와 SMR 협력을 통해 장기 Option을 확보하고 있지만 아직 구체적인 대규모 EPC 계약으로 전환되지는 않았다.
GS건설 역시 원전시장 진입 가능성은 있으나 현재 직접 확인되는 대형원전 Pipeline은 상대적으로 제한적이다.
다만 원전사업은 단일 건설사가 모든 공정을 가져가는 구조가 아니다.
한 프로젝트에 한전기술·두산에너빌리티·현대건설·삼성물산·대우건설과 현지기업이 함께 참여할 수 있다.
따라서 개별기업의 시장점유율을 단순 합산해서는 안 된다.
현재 기준으로는 K-EPC 전체가 2040년까지 약 900억~1,400억달러의 수주 Pool에 접근할 수 있고, 그중 현대건설의 선점효과가 가장 크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글을 마치며
이번 대미투자 협상의 핵심은 한국이 미국에 얼마를 투자하는가에만 있지 않다.
미국은 AI 경쟁에 필요한 발전용량을 빠르게 확대해야 하지만, 대형원전을 반복적으로 건설할 자본과 공급망, 숙련인력을 동시에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에는 Capital이 있다.
미국에는 Demand와 Technology가 있다.
한국에는 발전소를 실제로 완공할 수 있는 Execution이 있다.
이번 협상을 통해 한국이 미국 AP1000 건설에 참여하면 K-EPC는 미국 원전 시공 Reference를 확보하게 된다.
APR1400까지 미국에 배치된다면 한국 원전 공급망은 설계·주기기·건설·시운전·운영까지 포괄하는 Full Value Chain Reference를 갖게 된다.
결국 미국 원전 8기의 투자비가 얼마인지만 보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AP1000과 APR1400이 각각 몇 기인지.
한국 기업이 설계·주기기·시공 가운데 어디까지 맡는지.
첫 프로젝트 이후 반복발주에 참여할 권리를 확보하는지.
미국 Reference를 제3국 수주에 사용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2026년부터 2040년까지 중국·러시아·프랑스 내수시장을 제외한 해외 신규 원전 프로젝트의 총사업비는 약 4,500억~7,500억달러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EPC·설계기업이 실제로 경쟁할 수 있는 수주 Pool은 약 2,500억~4,500억달러다.
한국 EPC 기업이 가져갈 수 있는 누적 수주액은 기준 시나리오에서 약 900억~1,400억달러, EPC·설계 시장점유율은 35~45%로 추정된다.
아직은 TAM이다.
그러나 미국에서 AP1000을 완공하고 APR1400 배치권까지 확보한다면 TAM은 실제 Backlog로 바뀌기 시작한다.
이번 대미투자는 미국에 돈을 주는 협상으로 끝날 수도 있다.
반대로 미국 원전시장의 첫 Reference와 반복발주 권리를 확보한다면, 한국의 자본으로 향후 수십 년간 K-EPC가 접근할 수 있는 글로벌 시장을 사는 협상이 될 수도 있다.
결국 이번 협상의 가치는 투자금액이 아니라 그 대가로 확보하는 Reference·사업권·반복발주·수익배분이 결정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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