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Microsoft에서 나온 AI가 대체할 직업군이라고 한다.
여러 직업군중에 내 직업과 밀접한 RA 직업이(*노란음영) 눈에 띄어 글을 시작해본다.
Microsoft |
증권사 RA(*Research assistant)로 입사했던 초년 시절을 돌아보면, 하루 대부분을 단순 업무에 쏟아부었던 기억이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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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RT에서 재무 데이터를 크롤링해 기업별 어닝 모델에 직접 입력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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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룸버그에서 재무 데이터를 내려받아 정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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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산업 전망 보고서를 단순 취합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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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카피 보고서에 스프링을 끼워 제본을 만드는 일 등을 맡곤 했다.
이런 작업들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반복 노동이었고, 실질적인 부가가치는 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그 시간 속에서 묘한 만족감이 따랐다. 이어폰을 끼고 자리에 앉아 단순 작업을 반복하다 보면, 마치 하루를 성실히 일한 듯한 가짜 성취감이 찾아왔던 것이다. 누군가 시킨 일을 그대로 수행했기에 큰 책임도 없었고, 덕분에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는 그야말로 ‘가짜노동’의 전형이 아니었을까 싶다.
운용사로 이직한 초기 시절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금처럼 AI 도구가 보편화되기 이전이었기에, 재무 데이터를 일일이 수집해 어닝 모델에 하나하나 입력해야 했다.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지만, 오히려 그 단순함이 마음을 편하게 해줬었다. 결국 나 역시 가짜노동에 익숙해져 있었고, 반복 업무 속에서 시간을 흘려보냈던 셈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증권사와 운용사에서 과거처럼 단순 작업만을 위한 주니어 채용은 점점 사라지고 있으며, 이러한 ‘가짜노동’은 빠르게 AI로 대체되고 있다. 과거에는 섹터별 애널리스트와 매니저를 두고, 그만큼 인력풀이 많다는 것 자체가 조직의 강점으로 여겨졌지만, 이제는 오히려 소수의 옳은 판단력과 넓은 시야, 인문학적 배경을 갖춘 인재가 더 큰 경쟁력을 발휘하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이런 변화를 생각하다 보면, 하루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도 다시 고민하게 된다. 단순히 책상 앞에 앉아 주가 흐름을 들여다보는 시간이나, 빠르게 소비되고 사라지는 정치·경제 뉴스를 좇는 시간은 그다지 효율적이지 않다. 오히려 인문학적 소양을 넓혀줄 책을 읽고, 그것을 글로 정리하며 사고의 깊이를 키우는 일이 장기적으로 훨씬 더 가치 있는 선택이 아닐까 한다. 단순한 지식의 습득을 넘어, 사고의 질과 깊이를 높이는 과정이 곧 AI 시대의 경쟁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절대적으로 많은 시장 정보를 쥐고 있거나, 남들보다 빠르게 뉴스를 입수해 단기적인 매매로 대응하는 능력이 장점으로 통했다. 그러나 앞으로는 이런 단기적이고 얕은 수법은 점차 퇴출될 가능성이 크다. 대신, 겉으로 보이는 현상을 뒤집어 사고하고, 실상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품으며, 올바른 질문을 던져 남들이 보지 못한 가능성에 베팅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해지지 않을까 한다.
더 나아가, 이를 실행으로 옮길 수 있는 장기적 안목과 행동력이야말로 진정한 경쟁력있는 능력이 되지 않을까 한다.
또한 흥미로운 점은, 겉으로 바쁘게 무언가를 처리하는 모습이 오히려 AI 시대에는 가짜노동을 하고 있다는 징후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반대로 사무실에 앉아 멍하니 생각에 잠기거나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모습, 즉 과거 한국 사무직 문화 속에서 흔히 ‘땡땡이’로 취급되던 행위가 실제로는 AI 시대에 훨씬 적합한 노동이 될지도 모른다.
결국 필요한 것은 AI가 제공한 결과를 비판적으로 검증하는 능력, 새로운 것을 배우고 호기심을 유지하는 태도, 넓은 시야와 깊은 사고, 그리고 무엇보다 옳은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역량일 것이다.
실제로 최근 실리콘밸리에서는 철학 등 인문학적 교양을 갖춘 인재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팔란티어의 알렉스 카프, 피터 틸, 오픈AI의 샘 올트먼 같은 인물들은 사회 시스템의 근본을 의심하고 해답을 찾는 과정에서 보여준 사고의 깊이와 인문학적 배경, 그리고 그로부터 탄생한 AI 기업들의 성장이 바로 그 가치를 증명한다.
이는 결국 AI 시대에는 정형화된 학습 과정을 성실히 따라온 모범생들에게는 오히려 불리한 시대가 열리고, 반대로 기존 시스템에 끊임없이 의문을 품고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기존 사회 시스템에서 이탈자나 부적응자로 분류되어 왔던 사람들에게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AI는 사회 전반의 기존 규칙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내는 거대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가짜노동을 지양하고 AI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되, 인문학적 사고와 깊이를 함께 키워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과제가 아닐까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