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15일 수요일

위대한 왕 살라딘

아내와 이탈리아로 신혼여행을 다녀온 뒤 서양 근대사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여러 책을 읽던 중 우연히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을 집어 들었다. 제목이 워낙 매력적이어서 바로 읽기 시작했지만, 초반부는 다소 진부하게 느껴져 잠시 옆에 두었다. 그 사이 윈스턴 처칠 전기를 읽고, 팔란티어 테크놀로지스의 CEO 알렉스 카프가 직접 쓴 책도 완독한 뒤 다시 십자군 이야기로 돌아왔다. 마침 중반부에 이르러 살라딘이 등장했다.

어느 날 새벽 3시에 깨어 잠이 오지 않아 큰 기대 없이 살라딘 장을 펼쳤는데, 곧바로 몰입해 해가 뜰 때까지 읽고 그대로 출근길에 올랐다.

살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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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딘이 특별하게 다가온 첫 이유는 이전의 군주들과 전혀 다른 결을 지녔다는 점이다. 십자군(프랑크인)이 ‘성지 회복’의 명분으로 전쟁을 이어갈 때, 많은 지역의 통치자들은 민중보다 자신의 안위를 우선했고, 외세에 비위를 맞추거나 내부 경쟁자를 제거하는 데 급급했다. 주색과 향락으로 세월을 보낸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와 대비되게 살라딘은 검소함아량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전쟁과 기근으로 피폐해진 사람들을 돌보고, 심지어 적에게도 관대했다. 개인적 축재보다 공적 목적을 앞세웠다는 평판이 널리 전해지고 있으며, 말년에도 사사로운 재산을 크게 남기지 않았다.

살라딘은 처음부터 대정복을 꿈꾼 야심가라기보다, 시대의 요구와 기회가 그를 앞자리로 떠민 실무형 전략가에 가까웠다. 젊은 시절 그는 주군 누르 알딘의 명을 받아 이집트에 파견되었다. 1169년에 이집트의 **비지르(재상)**로 올라 행정과 군대를 정비했고, 1171년에는 파티마 왕조의 체제를 마무리하며 아바스 칼리파에 대한 종주권 복귀를 선언했다. 이로써 이집트의 실질 통치권이 그의 손에 들어왔다.

그의 주군 누르 알딘은 살라딘의 부상을 위협으로 인지하고 그를 처단하려 했지만, 살라딘은 누르 알딘을 안심시키고 군사적 충돌을 회피해가며 때를 기다렸다. 살라딘은 누르 알딘이 병마를 얻어 생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알고있었으며, 시간은 그의 편임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1174년 누르 알딘이 사망하자 살라딘은 시리아로 진출했다. 표면적으로는 미성년 후계자의 보호자를 자처하고, 십자군 방어와 질서 유지를 명분으로 삼았다. 다마스쿠스는 비교적 평온하게 귀속되었지만, 알레포와 모술 등은 오랜 시간에 걸친 협상과 압박 끝에 통합되었다. 요지는 무력·외교·정통성을 적절히 결합해 영역을 점진적으로 묶어냈다는 점이다.


그는 상황을 서두르지 않았고, 필요할 때는 기다렸다.

이러한 과정이 누적되면서 살라딘은 이집트의 군 통수권자 → 이집트의 통수권자 → 이집트·시리아를 아우르는 아랍 세계의 통수권자로 자리와 책임을 넓혀 갔다. 

남은 과제는 예루살렘 문제였다. 예루살렘 왕국에서는 아말릭 1세가 1174년에 사망했고, 뒤를 이은 보두앵 4세(‘나병왕’)도 1185년에 세상을 떠났다. 잠시 즉위한 보두앵 5세가 1186년에 사망하자 왕위는 시빌라와 그녀의 남편 기 드 뤼지냥에게 넘어갔다. 내부 분열과 무리한 원정이 겹치며 1187년 하틴 전투에서 십자군 주력이 크게 패했고, 그 여파로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 

이때도 마찬가지로 살라딘은 보두앵 4세 휘하에 있는 장군들의 내부 분열을 알고 있었으며, 그 중 강경파의 무능을 일찌감치 눈치챘으며 보두앵 4세가 죽고 강경파가 실권을 잡아 무리한 전쟁을 일으킬 때까지를 때를 기다렸다.  

이때 살라딘은 결전의 순간을 포착해 과감히 싸웠고, 이후에는 불필요한 소모전을 피했다.

이어진 **제3차 십자군(1189–1192)**에서 리처드 1세(사자왕)는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도착했다. **아르수프(1191)**와 자파(1192) 같은 큰 전투가 실제로 있었고, 리처드가 승리를 거둔 전장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예루살렘을 점령하지 못했고, 최종적으로 휴전이 맺어졌다. 해안 일부는 십자군이 보유하고, 성지 순례의 통행은 보장되었다. 

사실 혈기왕성한 리처드왕이 생의 쾌락을 즐기며 한창 나이에 두달간이나 척박하고 가족과 떨어져있는 아랍세계에서 오랜기간 머물생각이 없음을 간파한 살라딘은 또 다시 시간을 질질끄며 기다렸고, 이에 지친 사자왕 리처드는 살라딘과 휴전협정을 맺고 본국으로 돌아간 것이다.  

살라딘의 방식은 “싸우지 않음”이 아니라 **“싸울 때와 기다릴 때를 정확히 고르는 일”**에 가까웠다.

살라딘의 통치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돋보였다. 그는 부하들의 말을 경청했고, 권위를 과시하기보다 자신을 낮추는 리더십으로 신뢰를 쌓았다. 백성에게는 평정과 보호를, 심지어 적에게도 규범과 관용을 보여 주었다. 그 결과 그의 시대는 전쟁이 계속되는 가운데서도 비교적 안정된 질서를 누릴 수 있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자리는 그 사람의 본모습을 드러낸다”**고 믿어왔다. 살라딘을 읽고 생각할수록, 그가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오히려 그러한 본모습이 더 선명해졌다고 느꼈다. 그는 치적을 과장하려 부하를 소모하지 않았고, 최고 권좌에 올랐음에도 검소와 절제를 지키며 자신을 낮출 줄 아는 군주였다. 또한 그는 한 걸음 물러서 때를 기다리고, 상황을 끝까지 살피며, 기회가 무르익었을 때 단호히 결단하는 인물이었다.

이 대목에서 개인적인 기억이 겹친다.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어디 가서 자기자랑을 하지 말라”**고 일러 주셨다. 세상 사람들은 누가 허세를 부리는지, 정작 당사자만 모를 뿐 대부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과도한 칭찬이나 자랑에는 본능적으로 거리를 둔다. 돈자랑과 자기자랑, 배려 부족은 쉽게 신뢰를 무너뜨린다.

연말마다 이전 운용사에서는 A4 한 장에 성과급을 많이 받아야 하는 이유를 손글씨로 적어 제출하게 했다. 나는 그 요구에 한 줄만 적어 냈고, 이후 “무엇이 불만이냐”는 핀잔과 함께 왜 자기어필을 하지 않느냐는 말을 자주 들었다.

회식 자리에서는 옆자리에 앉은 동료가 대신 나의 장점을 말해준 적도 있다. 돌이켜보면, 나는 끝내 자기 어필의 필요성에 회의적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생각해 보면 내 이름의 뜻도 살라딘이 보여줬던 태도와 일부는 통한다고 느꼈다. 내 이름에는 **“옳은 일에 쓰이는 벼루”**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사람들은 보통 좋은 글과 관련해서는 붓과 먹을 떠올리지만, 먹을 제대로 갈아 주는 벼루가 뒤에서 받쳐 주어야 좋은 글이 나온다. 어머니의 가르침은 곧 벼루처럼 뒤에서 받치는 삶을 살라는 뜻이었고, 이는 겸손·절제·검소넓은 아량으로 적에게까지 귀감이 되었던 살라딘의 미덕에서 많은것을 추가로 배울 수 있지 않나 싶었다. 

마지막으로 기회가 올 때까지 묵묵히 기다리는 인내와, 때가 무르익으면 주저 없이 붙잡는 결단도 살라딘의 것이었다. 그는 싸울 때와 기다릴 때를 정확히 가려, 한발 물러서 상황을 끝까지 살피다가, 기회가 성숙하면 단호히 움직였다. 그런 그의 태도에서 투자를 해나감에 있어 언제 참아야 하고 언제 베팅해야 하는지에 대한 배움을 얻을 수 있다고 느꼈다.

책을 덮을 즈음, 나는 좋은 책과 본받을 인물을 우연히 만난 기쁨을 느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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