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춤과 회상: 나의 직진성과 그 흔적
어젯밤부터 오늘 오전까지 해야 할 일들을 미루고, 반도체 주가가 불을 뿜듯 오르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다 불현듯 과거 운용사 아침회의에서 내가 잘못했거나 심보가 좋아 보이지 않았던 행동들이 떠올랐고, 맥락 없이 떠오른 그 생각들을 이렇게 끄적여 남겨본다.
1. 지정학으로 확장한 시야와 그에 대한 제동
트럼프 1기 마지막 즈음, 나는 개별 기업과 개별 산업에서 글로벌 지정학 정세로 관심을 넓히기 시작했다. 평소처럼 맡아온 산업·개별 기업 업데이트를 마친 뒤 남는 시간에 지정학과 글로벌 경기 관련 발표도 덧붙였다. 그때 사내 상사님이 쓴소리를 했다.
“글로벌 지정학 관련 이슈는 앞으로 언급하지 않아줬으면 한다. 언제든 손바닥 뒤집듯 바뀔 수 있는 이슈라, 우리 투자 발굴과 프로세스에서는 지정학·글로벌 거시경제 이슈를 제외하고 있다.”
나는 알겠다고 했다. 그런데도 어느 순간부터 지정학·글로벌 거시, 특히 미국 정치 이슈에 대한 전망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면 내 산업 리서치가 막히는 기분이 계속 들어 답답했다. 그 답답함이 터진 지점이 아마 HMM 분석을 하던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2. HMM 사례: 강한 확신, 조직의 판단, 그리고 나의 침묵
HMM 주가가 약 50% 올랐을 때, 나는 사내에서 강하게 사야 한다고 매일 아침마다 발표했다. 하지만 회사 판단은 일시적인 수급 이슈로 곧 실적이 꺾일 것이라는 쪽이었고, 매수하지 않았다.
그 후 주가가 2배, 3배, 4배로 계속 치고 오르는 가운데, 사내에서는 왜 HMM을 사지 말아야 하는지에 관한 보고서를 다시 첨부해 내게 보내왔다.
나는 그 보고서를 잠깐 훑어보고 ‘감사하다’는 말만 남겼다. 그리고 그 이후 아침회의에서 주가가 오르는 동안 HMM 관련 이슈를 언급해달라는 부탁이 있었음에도 불구 단 한 번도 HMM을 언급하지 않았다.
돌아보면 괜한 심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자존심, 서운함, 답답함이 섞인 채 침묵을 선택했고, 그 침묵이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
3. 이직의 그림자: 말하지 못한 이유들과 결정
연초 성과급·연봉 협상이 잘 진행되지 않으면서, 열심히 해야겠다는 의지도 약해졌다. 그리고 만약 앞으로 지정학·거시경제, 미국 정치경제 관련 리서치의 상방이 막힌다면, 개인 투자자로서의 성장 상방도 막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이직 준비를 했다.
이전 회사 상사분은 혹시라도 사내 불만이나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으면 먼저 말해주면 고맙겠다고 했지만, 막상 그 상황이 되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런 상의 없이 혼자서 이직 결정을 내려버렸다.
이직이 결정된 뒤, 이전 회사 대표님께 먼저 이직 의사를 말씀드렸다. 대표님은 무슨 일이 있냐, 성과·연봉 관련 이슈라면 맞춰줄 수 있다고까지 했지만, 나는 내가 이직을 결정했던 이유들—위에서 적은 그 감정과 판단들—에 대해 딱히 언급하지 않았다.
이직 후 수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그때 마음에 담아두었던 이유를 글로 남기고 있는 내 심정이 나도 잘 이해되진 않지만, 블로그에 글을 쏟아내면 후련한 느낌이 드는 건 사실이다.
이직 후 지금까지 나는 기업·산업·자산군·지역의 경계 없이 관심 가는 돈되는 이슈를 마음껏 파고들 수 있었다. 주식·채권·부동산, 국내·해외를 가리지 않고 정치·경제·사회 이슈까지 통합적으로 분석하면서, 그때의 이직 결정에 매우 만족하며 지내고 있다.
앞으로 누군가 팀에 합류하더라도, 산업·기업·자산군별로 경계를 정하고 영역을 쪼개 분업하고 싶지는 않다. 대신 통합적 관점에서 비슷한 눈높이로 의견을 주고받는 방식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4. 다른 기억: 잠깐 인턴을 했던 운용사의 공기
그 회사는 아침 일찍 출근해 저녁 야근이 당연했다. 넓직한 공간에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장중에 잠깐 밖으로 걸어 나가는 것도 눈치가 보였다. 숨이 턱 막히는 회사였다.
남자들만 득실거리는 사무실, 화장실은 달랑 한 칸. 칸에 들어가면 각 임직원의 칫솔이 여럿 보였다. 무엇보다 칸막이도 없는 자리 바로 앞·뒤·옆에서 하루 종일 같이 일하는 상사와 북적이는 같은 화장실을 쓴다는 사실이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나는 지금도 출근 후 3~4시간 정도만 어닝모델 추정, 산업 이슈 정리 등 실무에 집중하고, 나머지 시간은 망상에 빠지는데, 그 회사의 시스템은 그런 리듬이 불가능한 구조였다. 너무 새장에 갇혀 있는 느낌이 강했다.
퇴근 시간이 되면 나는 빠르게 짐을 챙겨 숨 막히는 사무실을 서둘러 빠져나왔다. 어느 날 대표가 **대뜸 오더니 “너 바보야?”**라고 했다.
너무 당황해 아무 말도 못하고 대표 얼굴만 바라보는데, 대표는 왜 백오피스 직원들에게 퇴근할 때 인사를 안 하냐고 화를 냈다. 사회생활이 부족한 내 탓도 있겠지만, 그게 그렇게 잘못된 일인 줄 몰랐고, 무엇보다 기분이 너무 나빴다.
그 일은 모든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벌어졌고, 그런 상황이 한두 번이 아닌 듯해 보였다. 나는 그저 쉬쉬하며 넘어갔다. 이후 대표 앞에서는 쭈뼛거리며 별말 없이 지냈고, 주변에서는 **“너는 대표랑 첫 단추부터 잘못 꿰었다”**며 웃으며 농담을 하곤 했다.
평가 기간이 끝나고 정규직 전환 결정을 하는 자리에서 앞 상사와 대표가 뭐라뭐라 했지만, 나는 창밖 빨간 네온사인이 깜빡이는 족발집 간판만 보며 빨리 나가고 싶다는 생각만 했다.(그 족발집 네온 사인간판이 왜 아직도 또렷히 생각나는지는 나도 모른다.)
5. 나의 성향: 문제해결형 직진, 그리고 그 후폭풍
돌아보면 나는 빨리 돈을 모아야 한다는 생각에 너무 사로잡혀 있었다. 문제가 생기면 바로 해결해야 직성이 풀리는 INTJ라 문제에 집중할 때는 주변 상황을 잘 못 본다.
사회초년생 시절, 돈이 부족하다는 사실 자체를 문제로 규정했고, 이를 빠른 시일 내에 해결하려는 의지·조급함·불안함이 겹치면서 직진성이 더 강해졌다.
그 결과 주식투자 = 돈을 번다 = 문제해결이라는 단순한 공식이 지난 몇 년간 내 의식을 장악해 버렸다. 그 외의 문제들은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직진해 온 건 아닌가 싶다.
이번 여행에서도 한 가지에 꽂히면 주변을 보지 못하고 직진하는 내 스타일이 너무 도드라졌고, 와이프가 그 때문에 꽤 고생을 했다.
아무래도 알게 모르게 나의 직진 스타일로 인해 과거 함께 근무했던 사람들의 기분과 감정을 나도 모르게 상하게 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이제 와 미안함을 표하고 싶다.
6. 나의 일상적 성향과 만족, 그리고 과거의 오해
애초에 나는 회사에서 말이 별로 없고, 스몰토크도 싫어한다. 그냥 주식투자 분석만 하거나 망상에 빠졌다 퇴근하는 일이 잦고 그러한 일상에 나는 매우 만족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이전 근무했던 회사 가운데 (내 생각에) 나를 괴롭히고,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퇴사를 종용하는 협박을 한다고 느껴졌던 회사가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밖에 있던 내 자리를 자기들과 같은 방 안으로 이전시킨다고 통보했다. 나는 싫다고 했지만, 결국 내 자리를 이전시켜 버렸다. 나는 잠깐 시간을 달라고 회사에 양해를 구했고, 그 사이에 이직을 해버렸다.
이제 와 돌아보면 정말 별것도 아닌 일이 그때는 왜 그렇게 커 보였는지 아직도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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