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23일 월요일

너구리

현 와이프, 전 여자친구와의 통화는 늘 늦은밤 10시부터 시작이었다.

연애 초기에 우리는 연락 횟수를 정해두었다. 아침 출근길에 한 번, 내가 퇴근할 때 한 번, 그리고 와이프가 퇴근할 때 한 번. 하루 세 번. 그 약속이 생기고 나서부터 나는 10시 통화에 맞춰 하루를 정리하는 사람이 됐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씻고 밥을 먹고, 바로 잠을 청했다. 늦은밤 10시에 맑은 정신으로 통화하려면 그게 가장 확실했다.

본가 방에 앉아서 통화를 하면, 거의 자동적으로 침대에 누워 엄지발가락으로 본체 전원버튼을 켤 게 뻔했다. 신혼집을 장만하기 전 전 재산 올인해 둔 AI 미국기업 뉴스 탭을 열고, 기사 읽고, 시시각각 바뀌는 주가를 확인하는 흐름.

통화 중에도 그걸 못 참는 나를 아니까, 와이프와 통화할 때만은 아예 원천차단을 하기로 했다. 그래서 밖으로 나갔다. 나에게는 그게 제일 쉬운 방식이었다.

통화 연결음이 울리면, 나는 동시에 움직였다. 옷을 갈아입고 계단 5층을 빠르게 내려가 뒷산 산책로로 향했다. 걸으면서 통화하면 잠이 깨고, 말도 더 자연스럽게 나왔다. 늦은밤 산책로는 조용했고, 발소리와 숨소리만 또렷했다. 전화기 너머 목소리와 내 발걸음 소리가 같이 흘러갔다.

그날도 똑같이 걷고 있었다. 산비탈 언덕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갑자기 시선이 느껴졌다. 누가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산책로 옆 수풀 쪽이었다. 처음엔 기분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시 보니, 어둠 속에 작은 빛 두 개가 떠 있었다. 눈이었다.

멀리서도 눈동자가 반짝였다. 나는 걸음을 조금 늦췄다. 손에는 휴대폰이 있었고, 귀에는 와이프 목소리가 들렸지만, 순간 그쪽으로 신경이 쏠렸다. ‘들개인가?’ 생각이 먼저 들었다. 밤 산책로에서 들개는 딱 떠올리고 싶지 않은 단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세히 볼수록 무섭기만 하진 않았다. 꼬리가 유독 두툼해 보였다. 내가 한 발 다가가면, 녀석은 한 발 물러섰다. 내가 멈추면 녀석도 멈췄다. 내가 한 발 뒤로 물러나면, 녀석이 다시 한 발 다가왔다. 서로가 서로의 거리를 재는 느낌이었다. 가까워지지도 멀어지지도 않는, 애매한 선.


한밤중 멀리서 보면 들개 같아보이는 너구리

나는 일부러 모른 척하며 계속 걸었다. 하지만 걸으면서도 계속 그쪽을 보게 됐다. 녀석은 수풀 옆에 서서 나를 바라봤다. 내가 산책로를 더 멀리 가면, 어느 순간 사라졌다. 마치 “여기까지”라는 경계가 있는 것처럼.

그날 이후로 비슷한 일이 여러 번 반복됐다. 같은 시간대, 같은 장소. 멀리서 나를 지켜보는 눈빛. 두툼한 꼬리. 한 발 다가가면 한 발 물러나는 움직임. 밤 10시 통화는 점점 ‘산책로에서 그 녀석을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나도 모르게 그 구간에 들어서면 먼저 수풀을 찾았다.

그러던 어느 날, 녀석이 갑자기 두 발로 일어섰다. 순간 내가 멈췄다. ‘뭐지?’ 싶었다. 들개가 두 발로 일어서서 나를 보나? 그 생각이 스치자, 몸이 먼저 굳었다. 거리도 그 전보다 조금 가까웠다. 눈이 반짝이고, 몸통이 올라오고, 꼬리가… 꼬리가 너무 두툼했다.

그때부터 내가 가진 확신이 흔들렸다. ‘개가 맞나?’ 조금 더 가까이 가서 확인했다. 강아지의 선이 아니라, 야생동물의 느낌이었다. 얼굴이 길지 않았고, 어딘가 둥글었다. 그리고 마지막 몇 걸음을 더 가까이 옮긴 순간, 정체가 분명해졌다.

너구리였다.

그냥 너구리였다. 들개도 아니고, 내가 혼자 긴장할 이유도 없었던, 너구리. 그런데 그 순간 든 생각은 안도감보다도 “왜?”였다. 왜 너구리가 이 시간에 우리 본가 근처 산책로에 있는 걸까. 밤 10시에, 사람 지나가는 길목에, 그 거리에서 나를 보고 서 있었던 이유가 뭘까.

나는 와이프에게 사진을 찍어 보냈다. “나 야생 너구리 봤다.” 와이프는 사진을 보자마자 보노보노가 떠올랐는지, 너구리가 뒷발로 일어서서 점프하고 드롭킥을 날리는 상상을 하며 웃었다. 웃으면서도 말은 단호했다. 가까이 가지 말고 조심하라고.

그 뒤로 나는 너구리를 봐도 모른 척했다. 산책로를 늘 하던 속도로 걸었다. 너구리도 더 이상 뒷걸음질 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익숙해진 건지, 너구리가 익숙해진 건지, 서로가 그 거리 자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은 정말 가까웠다. 우연히 코앞 수준까지 겹쳤다. 순간 숨이 멎는 느낌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모른 척”을 유지하려고 시선을 피한 채로, 손만 움직여 근접샷을 한 장 찍었다. 찰칵 소리가 크게 들린 것 같았는데, 너구리는 도망가지 않았다. 그게 더 이상했다.


너구리 근접샷 직촬

그리고 며칠 뒤, 산책로 입구에 플랜카드가 붙었다. “너구리 출몰 주의.” 그 문구를 보자마자, 밤마다 내 시야 끝에 걸리던 그 두 개의 반짝이는 점이 떠올랐다. 뉴스 기사에서도 우리 동네에 너구리 출몰이 잦아졌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유는 단순했다. 길고양이를 위해 놔둔 사료를 야생 너구리들이 먹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너구리 가족이 이 동네 산책로와 공원에 아예 눌러앉아버렸다는 것이다.


언제부터 너구리가 서식한걸까..

그 얘길 읽고 나니, 내가 혼자만 알고 있던 비밀 같은 느낌이 조금 사라졌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밤 10시에만 열리는 작은 장면처럼 느껴졌던 일이 사실은 동네 전체의 일이었다. 뭔가 맥이 빠지기도 했다.

그래도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그때 내 눈에 들개처럼 보였던 눈빛과, 두툼한 꼬리. 그리고 내가 한 발 움직일 때마다 딱 한 발로 맞춰 움직이던 그 거리.

실물 길고양이보다 길너구리(?)가 더 귀여워 보였던 건, 아마 그냥 내 개인적인 취향인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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