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함의 습격과 선과 악을 보는 눈
최근 읽은 책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책이 있다. 제목부터 강렬한 **『편안함의 습격』**이다.
어느 저녁, 세상 편한 자세로 소파에 드러누워 이 책을 집어 들었다가, 그대로 끝까지 단숨에 읽어버렸다.
읽는 동안 내 머릿속에서는 계속 메모가 쌓여 갔다. “이대로 두면, 이 감정과 생각은 또 증발해버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글로 남겨두려 한다.
1. 멸균된 도시에서 툰드라까지
이 책에서 저자는 멸균된 도시의 편안한 생활을 살던 자신이 어느 날, 시베리아 툰드라로 순록 사냥을 떠나는 경험을 기록한다.
사냥 준비부터, 얼어붙은 대지에서의 기다림, 사냥의 실패와 성공, 추위와 배고픔, 더러움과 지루함, 육체적 피로까지 그 과정을 매우 세밀하게 써 내려간다.
그리고 다시 도시로 돌아와, 예전과 똑같은 일상을 다시 살기 시작한다.
변한 것은 환경이 아니라 그 환경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이다.
뜨뜻한 샤워, 깨끗한 침대, 불필요할 정도로 풍족한 음식, 그저 카드만 대면 해결되는 소비생활.
사냥을 다녀오기 전에는 그저 “원래 그런 것”이었던 것들이, 극한의 불편함을 경험하고 돌아온 뒤에는 압도적인 감사와 만족감으로 다시 다가온다.
결국 이 책이 말하는 핵심 중 하나는 이것이다.
**“편안함에 길들여진 상태에서는, 이미 누리고 있는 것의 소중함을 도저히 느낄 수 없다”**는 사실이다.
2. 뇌과학이 말하는 ‘적응’과 상대 비교
책 중간중간에는 흥미로운 뇌과학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중 특히 기억에 남는 내용이 있다.
인간의 뇌는 에너지 효율을 위해 모든 경험을 있었던 그대로 다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우리는 “절대값”이 아니라 “비교값”으로 기억하고 판단하도록 진화해왔다고 한다.
어제보다 나은지, 이전보다 더 좋은지, 남들보다 부족한지.
이 상대 비교의 메커니즘 때문에,
동일한 대상·동일한 경험을 반복할수록 그에 대한 만족감은 점점 떨어지도록 설계되어 있다.
새로운 편안함에 한 번 적응하고 나면,
이전의 편안함은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오늘의 편안함은 내일의 불편함이 되고,
오늘의 기준선은 내일의 **“최소 만족 조건”**이 되어버린다.
결국 우리는 계속 더 편안해지지만, 체감 행복은 거꾸로 떨어지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셈이다.
그래서 저자는 말한다.
일상의 컴포트존에서 잠시라도 벗어나, 불편함·지루함·힘듦을 일부러라도 경험해야만,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편안함과 풍족함을 다시 볼 수 있다고.
3. “악을 알아야 선을 안다” – 한 구절의 힘
이 책을 읽다 보니, 예전에 적어둔 인용구 하나가 떠올랐다.
조승연의 ‘TAMGULIFE 조승연의 탐구생활’에서 처음 접했던 문장이다.
아래는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가 『악의 꽃』 초판 표제지에 도비녜의 이 구절을 인용했다는 구절이다.
**Théodore Agrippa d’Aubigné(아그리파 도비녜)**의 『Les Tragiques』에 나오는 구절이다.
Mais le vice n’a point pour mère la science,
Et la vertu n’est pas fille de l’ignorance.
— Théodore Agrippa d’Aubigné, Les Tragiques, livre II “Princes”.
출처: Wikisource (Baudelaire, Les Fleurs du mal 초판 표제지 에피그래프)
대략 이렇게 옮길 수 있다.
악의 어머니는 지식이 아니며, 덕(정의)은 무지의 딸이 아니다.
이를 의역하면
좋은 것만 보게 하고 나쁜 것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고 해서 사람이 더 바르게 되는 것은 아니다.
더 알아서 악해지는 사람은 없고, 덜 알아서 정의로워지는 사람도 없다.
선과 악을 함께 보아야 세상의 전체가 보이고, 그 위에서야 현명한 판단이 가능하다.
즉, 내가 좋아하는 요지는 명확하다.
“악을 알아야 선과 정의를 안다.”
4. 투자, 일상, 그리고 구조를 보는 눈
내 경험으로도, 앞서 인용한 문장은 현실 세계와 상당히 잘 들어맞는다.
우선 투자 세계에서, 정말 좋은 투자를 찾기 위해서는
여러 자산, 여러 기업, 여러 산업을 끊임없이 비교해보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하나의 대상만 바라보고 있으면 그것이 비싼지 싼지, 좋은지 나쁜지조차 제대로 판단할 수 없다.
여러 후보를 나란히 놓고 상대적인 위치를 살펴본 뒤, 그중에서 가장 합리적인 선택지를 골라내는 과정 자체가 곧 투자라고 느낀다.
일상도 다르지 않다.
건강을 잃어보면 건강이 비로소 보이고,
관계를 잃어보면 그제야 관계의 의미가 또렷해진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의 소중함은,
그것과 정반대의 경험을 한 번이라도 겪어본 사람에게만 비로소 선명하게 다가온다.
최근 관심이 커진 부동산과 한국 정치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부동산 가격의 움직임을 이해하려면 “실수요냐 아니냐”라는 좁은 질문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함께 보아야 한다.
부동산이 속해 있는 전체 자산시장에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 안에서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정치인 집단의 이해득실 구조가
일반 국민의 이해득실 구조와 어떻게 어긋나 있는지,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여러 집단이 한정된 자원을 두고
어떤 방식으로 충돌하고 있는지.
이러한 구조를 함께 보지 못하면,
왜 부동산 가격이 이렇게 움직이는지,
그 배후에 어떤 힘이 작동하고 있는지 전체 그림을 이해하기 어렵다.
결국 어떤 영역에서든,
불편한 면을 외면하지 않고 구조 전체를 바라보는 시선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제대로 된 판단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느낀다.
5. 선과 악은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 이렇게 구조를 바라보다 보면,
감정이 스며드는 어느 순간, 가치판단의 기준점은 어디에 놓여 있는가?라는
피할 수 없는 질문에 다다르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악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다.
나와 내가 속한 집단의 이익을 해치는 것이 곧 악일까.
그렇다면 사회 전체의 공공선과 개인의 이해득실이 정면으로 충돌할 때,
우리는 어느 쪽을 선이라 부르고, 어느 쪽을 악이라 불러야 하는가.
자유민주 사회에서 다수결 원칙은 흔히 정당성의 근거로 제시된다.
그러나 “공공선을 위한다”는 그럴듯한 명분 아래,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범하는 다수의 횡포가 발생한다면,
우리는 어디까지 침묵하며 그것을 용인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다수는 언제나 선이고, 소수는 언제나 악이라는 말인가.
시간이 흐르고 환경이 바뀌면,
내가 어제 내렸던 가치판단이 오늘은 흔들릴 때가 있다.
그렇다면 내 안의 선과 악의 기준은
그저 시시각각 변하는 가변적인 가치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면 변화의 표면 아래 어딘가에 일관된 하나의 축이 존재하는 것일까.
나는 아직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갖고 있지 않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고 느낀다.
선이라고 믿는 것만 보려고 할수록
오히려 선과 악의 경계는 더 흐려진다.
불편함과 추함, 이해관계의 충돌, 그 속에 드러나는 이기심까지,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을 포함해 전체 그림을 함께 보는 시도가 있어야만
그나마 조금이라도 더 현명한 판단에 가까워질 수 있다.
6. 앞으로의 나를 위해
앞으로 태어날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인지, 교육은 어떻게 시켜야할지,
그리고 내가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지를 떠올리면,
앞서 던진 질문들이 더 이상 추상적으로만 느껴지지 않는다.
아이에게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부모라면 누구나 갖는 마음일 것이다.
하지만 도비녜의 문장이 말하듯,
좋은 것만 보게 한다고 해서 아이가 더 바르게 자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선과 악을 함께 볼 수 있는 눈,
편안함과 불편함을 모두 경험할 수 있는 감각.
결국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드는 바탕은
그 지점에서 비롯된다고 믿는다.
나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편안함에 안주한 채 눈을 감아버리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컴포트존 밖으로 걸어나가
기꺼이 불편함과 지루함,
때로는 손해 보는 감정까지 마주해보려 한다.
그래야만 내가 내리는 판단이
조금이라도 덜 단순하고, 덜 자기중심적이며,
조금이라도 더 전체를 향한 현명한 판단에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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