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30일 화요일

생각정리 150 (* 연준의 기원)



대공황, 연준, 그리고 ‘큰 정부’의 기원


— 밀턴 프리드먼을 다시 읽고


연말 휴가 동안 밀턴 프리드먼의 『선택할 자유』를 다시 읽었다.

20대 후반에 처음 읽었을 때는 “자유시장 옹호”라는 큰 틀만 어렴풋하게 남았을 뿐, 구체적인 역사·정책 논쟁은 잘 와 닿지 않았던 기억뿐이었다. 거시경제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고, 투자 실무에서 체감한 경험도 부족했고, 트럼프 행정부의 보호무역 정책이나 미국의 부채 레버리지 확대 같은 이슈도 아직 본격화되기 전이었다.

하지만 지금 다시 읽어보니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연준의 독립성 논쟁, 각국 재정적자의 상시화, 팬데믹 이후 인플레이션 재부상이라는 현실을 겪은 뒤라서인지, 프리드먼이 이야기하는 통화와 국가의 역할, 그리고 대공황·연준·복지국가의 기원이 훨씬 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문제로 다가온다.


이 글은 프리드먼의 시각을 따라가며

  • 1929년 대공황의 정치·경제적 의미,

  • 1907년 공황과 연방준비제도(연준)의 탄생,

  • 연준의 통화정책 실패와 ‘대수축’(Great Contraction),

  • 그리고 뉴딜·케인즈경제학·큰 정부의 정당화

를 하나의 흐름으로 정리해 보는 시도이다.


1. 대공황이 남긴 정치·경제적 상처


대공황(Great Depression)
은 1929년 뉴욕 증시 붕괴에서 시작해 1930년대 후반까지 이어진 세계적 경제위기이다. 산업 생산·국제무역이 급락하고 실업은 두 자릿수로 치솟았으며, 각국에서 대량 실업과 빈곤이 일상 풍경이 되었다.(Encyclopedia Britannica)

그 파장은 경제를 넘어 정치·사회 전반을 뒤흔들었다.

  • 독일에서는 극심한 실업과 불만이 나치당과 히틀러의 부상에 비옥한 토양이 되었고,

  • 일본에서는 해외 시장·자원 확보를 명분으로 한 군부 주도의 팽창정책이 강화되었으며,

  • 중국에서는 세계공황·은본위제 붕괴·전시 재정난 등이 겹치며 통화불안·인플레이션과 정권 불안정이 심화되었다.


경제사 관점에서 대공황은 다음과 같은 믿음을 남겼다.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불안정하며, 방치하면 주기적으로 심각한 위기를 초래한다.
그러므로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경기를 관리하고, 안전망을 제공해야 한다.


이 인식 속에서 루즈벨트의 뉴딜(New Deal) 은 구제·공공사업·금융개혁·사회보장제도 등을 통해 연방정부의 역할과 복지국가의 토대를 대폭 확장했다.(Encyclopedia Britannica)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 실업급여·연금·사회보장,

  • 경기침체 시 재정지출 확대,

  • 금융규제와 중앙은행의 적극적 역할


은 상당 부분 이 시기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프리드먼은 여기서 한 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대공황은 정말 시장경제의 내재적 실패였는가,
아니면 통화정책에 실패한 중앙은행(연준)의 인재였는가.


이 질문을 이해하려면 먼저 연준이 어떤 배경에서 만들어졌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2. 1907년 공황과 연방준비제도의 탄생


2-1. 1907년 공황: 예금 지급 제한과 시스템 마비


연준의 기원은 1907년 금융공황(Panic of 1907) 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7년 10월, 뉴욕의 신탁회사들을 중심으로 뱅크런이 발생했고 뉴욕증권거래소 주가는 전년 고점 대비 거의 절반 가까이 떨어졌다. 당시 미국에는 중앙은행이 없었기 때문에, 위기 대응은 사실상 민간 금융가와 개별 은행에 맡겨져 있었다.(연방준비제도 역사)

은행·신탁회사들은

  • 예금 지급을 제한하거나 일시 중단하고,

  • J.P. 모건 등이 민간 컨소시엄을 조직해 유동성을 공급하는 방식으로


위기를 간신히 막았다. 단기적으로는 대규모 붕괴를 막았지만, 동시에 결제 시스템과 신용공급을 마비시켜 통화·신용을 급격히 줄이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 결과 1907~1908년의 경기침체는 당시 기준으로 매우 심각한 실물 불황을 동반했다.(연방준비제도 역사)

이 경험은 금융계와 정치권에 명확한 문제의식을 남겼다.

민간 금융가의 자발적 구조조정만으로는 위기를 막기 어렵다.
국가 차원의 마지막 대부자(lender of last resort) 가 필요하다.


2-2. 1913년 연방준비법과 연준의 설립


이 문제의식은 여러 차례의 조사·논의를 거쳐 1913년 연방준비법(Federal Reserve Act) 제정으로 이어진다.(Investopedia)

이 법에 따라

  • 미국 전역을 12개 구역으로 나눈 연방준비은행(Federal Reserve Banks) 이 설립되고,

  • 워싱턴 D.C.에 연방준비제도 이사회(Board of Governors) 가 설치된다.(위키백과)


연준에 부여된 핵심 기능은 다음과 같다.

  • 발권 기능: 연방준비권(Federal Reserve notes)을 발행해 통화량을 조절

  • 최종 대부자 기능: 일시적 유동성 위기에 빠진 상업은행에 재할인·대출 제공

  • 은행·결제 시스템 감독: 준비금·결제·감독 기능을 통해 시스템 안정 도모


즉, 1907년처럼 예금 지급 제한 → 결제 마비 → 통화 급감 → 실물대공황으로 이어지는 패턴을 막기 위해, 연준은 필요할 때 통화를 공급하고 은행에 유동성을 투입할 법적 권한을 부여받은 것이다.(연방준비제도 역사)


3. 1차 세계대전과 연준의 위상 변화


3-1. 전비 조달과 인플레이션


연준의 위상이 급격히 달라진 계기는 1차 세계대전이다.
미국은 1917년 참전하면서 막대한 전비를 조달해야 했고, 연준은

  • 전쟁채권 판매 지원,

  • 저금리 유지·통화 공급 확대


를 통해 전쟁 재정을 뒷받침하는 중심 기관이 되었다.(HISTORY)


이 과정에서 1910년대 후반 미국 물가는 빠르게 상승했고, 전쟁이 끝난 이후인 1919~1920년에도 인플레이션이 상당 기간 지속되었다는 점이 기록된다.(Encyclopedia Britannica)

이 경험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1. 연준이 재정·전쟁정책을 뒷받침하는 통화정책의 핵심 기관으로 자리잡았고,

  2. 전쟁이후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한 긴축 과정에서
    “연준의 결정이 경기·물가를 좌우한다”는 인식이 확고해졌다.

3-2. 벤저민 스트롱과 1920년대의 연준


이 시기의 핵심 인물이 뉴욕 연방준비은행 초대 총재 벤저민 스트롱(Benjamin Strong) 이다.
그는 1914년부터 1928년 사망 때까지 뉴욕 연준을 이끌며, 사실상 연준 시스템 전체의 정책 방향을 주도했다.(위키백과)


프리드먼의 평가에 따르면 스트롱은

  • 경기부양과 긴축의 균형을 맞추며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려 한 능력 있는 통화관리자였고,

  • 1920년대 연준의 상대적 안정성을 이끌던 핵심 리더였다.


그의 급작스러운 사망(1928년)은

  • 뉴욕 연준과 워싱턴의 이사회,

  • 여러 지역 연준들 사이의 권력 균형 변화를 촉발했다.


이사회는 뉴욕 연준의 영향력을 견제하려 했고, 지역 연준들은 이사회 리더십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 결과 1920년대 후반의 연준은 분열되고 우유부단한 의사결정 구조로 이행하게 된다.


4. 1929~1933년: ‘대수축’과 연준의 실패


4-1. 주가 붕괴 이후의 초기 대응


1929년 10월 뉴욕 증시 붕괴 이후, 뉴욕 연준은 스트롱 시절에 익숙했던 방식대로

  • 국채 매입 등 공개시장조작을 통해 시중 유동성을 공급하며

  • 금융시장의 충격을 완화하려 했다.


그러나 워싱턴의 연준 이사회와 다른 지역 연준들은

  • 과도한 완화가 투기를 부추길 것이라는 우려,

  • 뉴욕 연준의 영향력 견제라는 정치적 동기 속에서


공세적 완화 정책에 제동을 걸었다.

프리드먼의 표현을 빌리면, 이 시점부터 연준은 점차 “방관적이고 수동적인 통화정책” 으로 후퇴한다.

4-2. 은행 파산과 통화량 1/3 감소 – ‘대수축’


문제의 핵심은 1930~1933년 사이 반복된 은행 파산과 뱅크런이었다.

  • 수천 개 은행이 문을 닫으며 예금이 동결·소멸되었고,

  • 연준은 최종 대부자(lender of last resort)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지 못했다.


프리드먼·슈워츠의 계산에 따르면, 1929년 경기 정점에서 1933년 저점까지 미국의 통화량(M2)은 3분의 1 이상 감소했다. 이 기간의 급격한 통화수축은 단순한 경기침체를 넘어, 가격·임금·산출이 동시에 하락하는 대규모 디플레이션 충격으로 작용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Encyclopedia Britannica)


프리드먼은 이 시기를 **“대수축(The Great Contraction)”**이라고 부르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대공황은 시장경제의 자생적 붕괴가 아니라,
연준이 은행위기를 방치하고 통화수축을 용인한 결과이다.


4-3. 금본위제의 족쇄와 긴축


여기에 국제 금본위제 체제가 추가적인 족쇄로 작용했다.

  • 1931년 영국이 금본위제를 포기하자,

  • 투자자들은 달러의 금 태환 가능성을 의심하며 금으로 이동했다.(Encyclopedia Britannica)

  • 미국은 금본위제를 방어하기 위해 금리를 인상하고 통화긴축을 선택했다.


금본위제 아래에서 통화당국은

  • 경기침체 국면에서도 금 유출을 막기 위해

  • 금리를 올리고 통화량을 줄이는 선택을 강요받을 수밖에 없다.


프리드먼의 시각에서 보자면,

연준은 금본위제를 유지하기 위해 국내경제를 희생하는 결정을 반복했고,
그 결과 디플레이션과 실업이 한층 심화되었다.

 


5. 뉴딜, 케인즈경제학, 그리고 ‘큰 정부’의 정당화


5-1. 루즈벨트의 뉴딜과 복지국가의 토대


대공황의 정치적 책임을 떠안은 후버 대통령은 1932년 선거에서 루즈벨트에게 패했고,
1933년 출범한 루즈벨트 정부는 뉴딜(New Deal) 을 내세워 대규모 정책 전환에 나선다.


뉴딜은

  • 공공사업 및 고용 프로그램(CCC, WPA, PWA 등),

  • 금융개혁(FDIC 설립, 은행 휴업, 증권규제),

  • 농업·주택 지원,

  • 1935년 사회보장법(Social Security Act) 등을 통해(Encyclopedia Britannica)


미국 연방정부의 역할을 “야간경찰국가(minimal state)”에서 복지국가(welfare state)의 방향으로 크게 확장시켰다.

즉, 대공황은

  • 경기관리(거시경제 안정화)와

  •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 제공이라는 명분 아래


“큰 정부” 모델
을 정당화한 결정적 계기였다.

5-2. 케인즈경제학과 프리드먼의 반론


사상적으로 이 전환을 뒷받침한 것은 케인즈경제학(Keynesian economics) 이다.

  • 유효수요 부족이 장기간 지속될 수 있으며,

  • 이때는 정부의 재정지출과 통화정책으로 수요를 보완해야 한다는 논리가
    대공황의 경험과 결합하면서 주류 거시경제학 패러다임이 되었다.(Encyclopedia Britannica)


프리드먼은 여기서 두 가지를 문제 삼는다.

  1. 대공황의 원인이 시장·민간경제의 구조적 불안정성으로만 해석되었고,

  2. 그 결과 정부·중앙은행 권한 확대가 구조적으로 정당화되었다는 점이다.


그의 논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대공황은 “자유시장 = 위험, 정부개입 = 안전”이라는 이분법을 낳았지만,
실제로는 연준의 통화정책 실패와 제도 설계의 문제가 훨씬 더 중요한 원인이었다.

 


6. 연준 권력의 제도화와 오늘의 논쟁


대공황·뉴딜·제도개편을 거치며

  • 워싱턴의 연준 이사회(Board of Governors)는 지역 연준들에 대한 권한을 강화했고,(위키백과)

  • 연준은 독립적인 통화정책 기구이자, 금융안정·위기대응의 중심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프리드먼의 비판적 서술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연준은 대공황 시기 최종 대부자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지 못해 위기를 대형 참사로 키웠음에도,

  2. 이후 역사에서는

    • 경기확장기에는 자신의 공을 강조하고,

    • 위기 때는 외부 요인 탓을 하는 경향이 강했다.

  3. 그럼에도 연준의 상징·권위, 그리고 정치·경제 체제 내 영향력은 오히려 강화되었다.


물론 오늘날의 연구들은

  • 대공황의 원인을 연준의 실책 하나로 환원하는 것은 과도하다고 보면서도,

  • 연준의 통화 수축과 은행위기 방치가 위기를 극단적으로 심화시켰다는 점에는 상당한 합의를 보인다.(Encyclopedia Britannica)

이 지점에서 다시 현재로 돌아오면,

  • 연준의 독립성 논쟁,

  • 대규모 재정적자와 국채 발행,

  • 구조적 인플레이션의 가능성


이라는 오늘의 쟁점은, 결국 **“국가·중앙은행·시장 사이의 역할 분담을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라는, 대공황 이후 100년 넘게 이어져 온 질문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맺음말: 다시 프리드먼으로, 그리고 지금의 연준으로


정리하면,

  • 1907년 공황은 “민간이 감당할 수 없는 금융위기 앞에서 누군가는 최종 대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남겼고,(연방준비제도 역사)

  • 그 결과 탄생한 연준은 1차 세계대전, 1920년대, 대공황을 거치며
    재정·통화·금융을 아우르는 핵심 권력기관으로 변모했다.

  • 대공황과 뉴딜
    시장의 실패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큰 정부·복지국가·중앙은행 권한 확대를 정당화했다.


프리드먼의 『선택할 자유』는 이 역사를 거꾸로 읽으면서,
대공황을 시장 자체의 실패가 아니라 통화정책 실패가 키운 인재로 해석하고,
오늘날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 큰 정부,

  • 복지정책,

  • 독립적인 중앙은행


의 정당성을 다시 묻는다.


여기에 한 가지 개인적인 인상을 덧붙이자면, 연준의 기원 자체가 애초부터 정치적 권력투쟁의 산물이었다는 점이 계속해서 마음에 남는다.

100년 전 연준을 둘러싼 논쟁과 오늘날 연준 인사·정책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을 나란히 놓고 보면, 연준이라는 조직이 권력을 둘러싼 정치집단이라는 측면에서는 과거와 지금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된다.

  • 1907년 → “중앙은행이 필요하다”

  • 1930년대 → “큰 정부·복지가 필요하다”

  • 2008년 → “무제한 유동성과 비상대출이 필요하다”

  • 2020년 → “팬데믹 재정·통화 쌍둥이 부양이 필요하다”

매번 위기 → 제도·권한 확대 → 새로운 ‘뉴 노멀’ 이 반복되고,
그 과정에서 “독립적”이라고 불리는 기관(연준)은 계속해서 더 깊이 정치와 시장 사이의 경계에 발을 담그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동시에 과거 연준 의장들의 자서전을 반복해서 읽어볼수록, 그리고 최근에는 앨런 그린스펀의 자서전을 곱씹어볼수록, 

21세기 통화정책 (*벤 버냉키)
The Lord of easy money
The Age Of Turbulence, Alan Greenspan

그들이 구사한 통화정책이 실제 거시경제의 결과에 어느 정도까지 영향을 미쳤는지,
또 어느 지점부터는 정치·시장·우연이 섞인 구조적 결과였는지는 누구나 한 번쯤 던져볼 만한 질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현재 진행 중인 연준 독립성 논쟁, 재정 팽창과 부채 문제, 인플레이션 재부상을 생각하면,
연준의 기원과 대공황의 해석을 다시 뜯어보는 작업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그 작업은 지금도 계속되는 권력투쟁의 구조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고 느낀다.

2026년을 앞두고 연준의 위상 변화와 독립성 훼손 가능성이 부각되는 만큼, 과거 아서 번스 시기처럼 정치적 압력에 정책이 휘둘리거나 1931~1933년 연준 내부의 권력투쟁처럼 의사결정이 마비되면서 결과적으로 인플레이션 통제에 실패할 시나리오도 배제하지 말아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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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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