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직감, 우리의 아파트
지난해 초 우리는 본격적으로 서울 아파트 임장을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확신이 없었다. 단기적으로는 민주당 집권 기간 동안 부동산 가격이 오를 수 있다고 보았지만, 중장기적으로는 한국 부동산 시장이 불안정해 보였다.
그래서 자산의 큰 비중을 국내 부동산에 묶어두고 싶지 않았고, 무엇보다 해외주식투자에서 오는 쏠쏠한 이익을 계속 즐기고 싶었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적당히 괜찮은 가격대”**에서 답을 찾으려 했고, 첫 임장은 가성비 아파트 단지에서 시작되었다.
경사가 심한 언덕 위, 창밖으로 절벽이 보이는 단지였다. 아이를 키우기에는 다소 걱정스러운 구조였지만, 가격은 인근 단지보다 훨씬 저렴했다. 우리는 오르막과 내리막을 오가며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역 근처의 평지 대규모 단지를 발견했다.
그 순간, 오르막을 기어오르듯 다녔던 피로 때문인지 몰라도, 평지라는 점이 주는 안정감이 크게 다가왔다. 단지를 돌며 시세를 확인해보니 방금 본 아파트보다 60~80% 비쌌다. 큰 길 하나 사이에 두고도 가격 차이가 이렇게나 크다는 게 놀라웠다.
그곳은 10개 단지, 1만 세대가 넘는 대단지였다. 우리는 이후로 1년 가까이 8단지 내 여러 아파트동을 오가며 매물이 나온 모든 아파트 매물을 왠만해선 다 보며 꾸준히 임장을 했다. 그 과정에서 아내는 본능적으로 단번에 ‘대장 단지’를 짚어냈다.
뷰가 막혔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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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에서 멀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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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사가 심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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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배정이 불리하거나,
4층 이하의 층수가 낮거나,
햇볕이 잘드는 남향, 남동향 아파트가 아니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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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식, 주상복합, 소규모 단지 혹은 단독동 같은 구조였다.
아내는 이런 조건들을 자연스럽게 걸러냈다.
나는 여전히 입지가 별로여도 신축 단지의 깔끔한 외관과 조경, 그리고 여전히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의 아파트 동 아파트 단지들에 눈이 갔지만, 아내는 단호했다. 초역세권과 평지 두 가지 입지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아무리 좋아 보여도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가격이 너무 비싸 보여서 보지 않으려 했던 입지가 가장 좋은 대장단지 대장아파트를, 공인중개사의 권유로 억지로 들어가 봤다. 그런데 아내는 그 자리에서 확신했다. “여기다.”
이후 몇 군데를 더 보긴 했지만 이미 마음은 첫 순간에 정해져 있었다. 우리는 더 이상 아파트 구매를 뒤로 미루기에도 여유가 없었고, 처음 본 아파트가 너무 마음에 들어 그날 바로 계약금을 넣었고, 그 이후 대출, 인테리어, 가전까지 일사천리로 이어졌다.
흥미롭게도 우리가 매수한 아파트는 매수 직후 지금까지 신고가를 가장 먼저 갱신하며 빠르게 가격이 올랐다. 아내의 직감이 그대로 증명된 셈이다.
심지어 입지가 다소 떨어졌지만 신축 프리미엄으로 높은 시세가 형성되어있던 인근 신축 대단지 아파트 가격도 금세 따라잡았다. 결국 ‘입지 불패’ 원칙은 틀리지 않았다.
돌아보면, 나는 원래 언덕 많은 동네에서 살아왔고, 역세권과 편의시설의 중요성을 크게 체감하지 못했다.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며 다니는 게 당연했고, 생활 인프라가 부족해도 그럭저럭 적응해왔다. 하지만 아내는 달랐다. 아파트 생활에 익숙했고, 생활 인프라가 주는 편리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평소엔 조용하고, 소비에도 욕심이 없던 아내였다. 그런데 주거 문제 앞에서는 기준이 명확했고 주장이 뚜렷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내는 아파트 시장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던 것 같다. 입지 불패. 그 단순하지만 강력한 원칙을 직감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지난 몇 년간 해외 주식을 열심히 했지만, 아내가 고른 아파트의 가격 금액에는 한참 미치지 못했다.
우리 아파트 가격이 실거래가로 쭉쭉 올라갈 때마다, 속으로 늘 같은 생각이 든다.
“그때 아내 말 들은 게 천만다행이지…”
만약 그때 괜히 고집부리다가 아내 의견을 무시했더라면? 지금쯤 나는 집값이 오르는 걸 구경만 하며, 신혼의 첫 단추를 거꾸로 끼운 채 한숨만 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아내는 지금도 가끔 그때 일을 들춰낸다.
“여보, 신혼을 신축 전세 빌라에서 시작하자고 했던 거 기억나?”
“역시 집 문제만큼은 아내 말이 법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떠도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아내의 부동산 투자 한 방이 남편의 주식 실패를 덮는다.”
=끝
댓글 2개:
부동산에서 가장 중요한 3가지가 있다고 하죠. 1번 목, 2번 목, 3번 목.
글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저도 이번에 말로만 듣던 입지의 중요성을 새삼 다시 깨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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