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봉준호 감독이 수상식에서 언급한, 존경해온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말이다.
이번 이탈리아 여행 일정을 마치고 돌아와, 그동안 느낀 생각을 두서없이 남겨본다.
#베네치아(=베니스)
여행지 중 가장 인상 깊었던 도시, 다시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전 세계 유일의 수상도시답게 산타 루치아 역에 내리자마자 햇볕 아래 알록달록한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풍경이 여행객을 맞아주었다.
역사적으로 베네치아는 이탈리아 도시국가 중 가장 먼저 막대한 부를 축적한 도시였다. 해상 요충지로서 중개무역을 장악했고, 십자군 전쟁 때는 군수 보급과 선박 제공을 통해 엄청난 부를 쌓았다.
1. 지정학적 입지: 아드리아해와 지중해 무역의 요충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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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적 조건: 베네치아는 아드리아해 북쪽 끝 석호 위에 위치해 동지중해–서유럽을 잇는 교역 네트워크의 관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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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무역의 거점: 비잔틴 제국, 레반트(레바논·시리아·팔레스타인), 오스만 지역과의 교역에 최적화된 입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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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역 품목: 향신료, 비단, 보석, 곡물, 노예 등 고부가가치 상품이 베네치아 항을 통해 유럽으로 유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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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박·해상 기술: 일찍부터 조선업과 해군력이 발전해 해상무역 경쟁에서 앞섰다.
→ 따라서 중세 초기부터 동서 무역을 독점하며 제노바·피사보다 먼저 안정적인 부를 확보할 수 있었다.
2. 십자군 원정과 베네치아의 기회주의적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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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십자군(1096~99) 이후, 베네치아는 수송과 군수 보급을 담당하며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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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십자군(1204)**에서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베네치아는 십자군을 직접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끌어 비잔틴 제국을 무너뜨리고 도시 약탈에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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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크레타, 키프로스 등 동지중해 전략 섬들을 확보하고, 비잔틴 제국의 교역권과 항구를 상당 부분 장악했다.
→ 결과적으로 십자군 전쟁은 베네치아의 동지중해 무역 독점권을 공식화하는 계기가 되었고, 피사·아말피 같은 경쟁 도시국가를 밀어냈다.
3. 정치·제도적 안정성과 금융 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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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는 주변 경쟁 도시국가와 달리 귀족 공화정 체제로 빠르게 이행해 내부 분열이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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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세력과도 균형 외교를 펼쳐 안정성을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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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무역 발달 → 해상보험·신용거래 제도 발전 → 무역 리스크를 낮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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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과의 교류를 통해 기술과 문화가 일찍부터 유입되어 장기적 경쟁력을 확보했다.
작은 영토였지만, 경제·문화·정치·지리적 요충지로서 강력한 해상 강국이 되었고, 심지어 이탈리아 통합 과정에서 가장 늦게 합류한 도시국가이기도 했다.
4. 무역 패권의 도전과 쇠퇴
(1) 지중해 무역의 황금기 (11~15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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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는 비잔틴·레반트·이집트·시리아와 교역하며 향신료·비단·보석을 유럽에 중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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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원정을 활용해 동지중해 항로를 독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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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력·금융·정치적 안정성을 기반으로 번영을 구가했다.
(2)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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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면서 동지중해 무역에 큰 차질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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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은 향신료 무역 통제권을 장악, 베네치아는 특권을 유지하려고 막대한 조공과 관세를 지불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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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중개무역 비용이 상승해 경쟁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3) 대서양 시대 개막 (15~16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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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1498년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 항로 개척 → 세계 무역의 중심이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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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 세비야, 암스테르담, 런던 같은 대서양 항구 도시들이 새로운 패권국으로 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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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륙의 향신료·금·은·설탕이 곧장 대서양으로 유입되면서 베네치아의 중개무역 독점 모델은 붕괴.
(4) 쇠퇴와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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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조선업과 지중해 무역에서 영향력이 있었지만, 세계경제의 흐름에서 소외되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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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이후 점차 관광·문화·예술 도시로 정체성을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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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7년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 → 베네치아 공화국 해체 → 오스트리아 합병으로 정치적 독립은 종말을 맞았다.
5. 교훈: 베네치아와 대한민국
중세 베네치아는 아드리아해의 지정학적 요충지를 기반으로 동지중해–서유럽을 잇는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고, 십자군 전쟁을 지원·유도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특히 제4차 십자군에서 베네치아는 십자군을 콘스탄티노폴리스 침략으로 유도했고, 그 과정에서 도시 약탈에 앞장서며 엄청난 이득을 챙겼다.
그러나 이 단기적 이익 추구는 장기적으로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십자군에 의해 약화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결국 1453년 오스만 제국에 함락되었고, 베네치아는 오히려 오스만 제국의 무역 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다. 향신료 무역의 통제권은 오스만이 장악했고, 베네치아는 무역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조공과 관세를 지불해야 했다. 그 결과 중개무역 비용은 급격히 상승했고, 베네치아의 장기적 경쟁력은 약화되었다.
즉, 단기적 이익에 집착해 장기적 핵심이익을 놓친 대표적 사례가 바로 베네치아였다.
이어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1498년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 항로 개척으로 세계 무역의 중심축이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이동하면서 베네치아의 몰락은 불가피해졌다.
오늘날 대한민국 역시 이 교훈을 주목해야 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에너지·조선·방산에서 단기적 수혜를 얻었지만, 지정학적 질서 재편 속에서 그 효과는 언제든 역풍으로 돌아올 수 있다. 또한 기후변화로 북극항로가 열리며 유럽–아시아 무역의 중심축이 바뀔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이는 새로운 기회일 수도 있지만, 주요 열강이 주도권을 장악한다면 동북아 해상 허브로서의 한국의 지위가 흔들릴 수 있다.
베네치아의 사례는, 단기적 이익에 안주하거나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하면 과거의 번영이 오히려 몰락의 원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6. 오늘날의 베네치아
현재의 베네치아는 과거의 영광을 보존한 채 관광 중심 도시로 변모했다.
본토 섬에 거주하는 인구는 줄었고, 오래된 건물과 침하된 지반, 울퉁불퉁한 길, 기후위기로 인한 해수면 상승과 잦은 범람은 주거지로서의 기능을 약화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상택시에서 바라본 베네치아의 풍경은 여전히 압도적으로 아름다웠으며, 과거의 영광을 보여주는 여러 문화유적, 헤리티지가 잘 보존되어 있어 관광 도시로서의 희소성은 오히려 더욱 두드러지고 있었다.
베니스에서 가장 오래됐다던 디저트 가계에서 먹었던 티라미수를 와이프와 함께 다시 한번 먹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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